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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송목 Feb 09. 2023

사람들은 왜 합스부르크 600년에 열광할까?

드로잉 왕초보 성장일기

연속 매진,  2주 연장

여기저기 온통 ‘합스부르크 600년’ 이야기다. 신문, 방송, 주변이 모두 난리법석 화제다. 신문보도에 의하면 2월 중순 이후 3.1일 폐막분까지 완판 되어 박물관측은 2주간 연장(3.15)한다고 발표했다. 나도 1월 초 입장권 구입하려 했지만, 진작 매진되어  2월 2일 표를 겨우 구해봤다. 그마저도 시간대별로 입장하게 되어 인산인해까지는 아니지만, 작품 감상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최종 관람객은 약 3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나는 미술 관련 전문가도 아니고 미술 공부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냥 일반인이다. 그런 내가 처음 이 전시회를 접했을 때 생각은 ‘600년’이라는 긴 시간 유럽을 지배한 가문이라 그런가? 긴 세월 배출해 낸 작가나 작품이 유명해서인가? 아니면, 중세 초기 스위스 북부와 독일 남부 지방의 조그마한 성주 집안에서 사실상 유럽 전역을 지배한 입지적인 가문이라 그런가? 등  그 정도가 내가  전시회의 인기 폭발에 대해 내가 상상할 수 있는 한계였다.


왜 보는가? 무엇을 볼 것인가? 어떻게 볼 것인가? 

 뭐든 무엇을 볼 때 관전 포인트가 중요하다. 이번 ‘합스부르크 600년’을 어떤 관점, 어떤 눈으로 보는 게 재미를 더할까? 이런 점에서 빈미술사박물관 자비네 하그(Savine Haag) 관장은 박물관을 박제된 의미를 관람객에게 강요하는 장소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가 만나 새로운 의미가 생성되는 삶의 현장이라고 다.


오스트리아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소설 <옛 거장들>의 주인공 레거는 이틀에 한 번 빈미술사박물관을 찾는다. 그는 30년 넘게 오직 틴토레토의 하얀 수염의 남자' 앞에 앉아 작품의 오류를 찾는 데 몰두한다. 우스꽝스러운 설정이지만 이 소설은 이미 해석되고 정형화된 예술 감상을 비판하고 도발한다.


이번 ‘합스부르크 600년’ 전시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1부 황제의 취향을 담다, 프라하의 '예술의 밤'

2부 최초의 박물관을 꾸미다. 티롤의 암브라스 성/ 테마, 갑옷은 패션이다

3부 매혹의 명화를 모으다. 예술의 도시 빈

4부 대중에게 선보이다. 궁전을 박물관으로

5부 걸작을 집대성하다. 빈미술사박물관

에필로그/ 더 가까이, 오스트리아에 전한 조선의 마음


기획자들이 이끌어가는 대로 전시를 따라가면서 보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다 하지만, 박제된 전시회  투어가  될 가능성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주어진 시선만으로는 본다면 주어진 대로 지식과 느낌만 전달받는다. 한 공간을 공유하기 위해 우리 모두가 똑같아질 필요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합스부르크 600년’ 전시를 보는 눈을 조금 다른 각도로 가져가야겠다. 혹 눈 돌리다 보면 <옛 거장들> 속의 주인공 레거처럼 제2 제3의 눈과 온도의 감각을 가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구입한 도록

독자들에게 많은 정보를 나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위해 현장에서 구입한 도록(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100배 즐기기)을 중심으로 참고하여 발췌, 인용, 요약 정리해 보았다. 600년 이야기를  글 한편으로 정리하다 보니 좀 길어졌다. 적당히 넘기면서(skip) 읽어주시기 바란다.


합스부르크 어떤 가문인가?

신성로마제국은 1273년 루돌프 백작(루돌프 1세)이 독일왕으로 즉위한 것으로 시작하여 1918년 카를 1세의 제국 통치 포기 선언까지 645년의 긴 역사를 가진 제국의 역사이며 합스부르크 가문의 역사이기도 하다. 지금의 오스트리아는 영세중립국이며 중부 유럽의 조그만 내륙 국가에 불과하다. 그러나 1500년대부터 제1차 세계대전직전까지 이 나라는 신성로마제국 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라는 이름으로 전 유럽에 위세와 명성을 떨쳤다.


미술사에서 합스부르크가가 왜 그렇게 유명할까?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645년의 긴 역사, 방대한 컬렉션, 보관을 위한 기획된 박물관 건립과 과감한 일반 대중 공개 등이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미술 소장품이 있는 빈미술사 박물관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 황제에 의해 1776년 대중에게 개방되었다. 1793년 설립된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보다 17년 먼저다.  


초창기 빈외곽 벨베데레 상궁 건물이었으나, 독일의 건축가 카를 폰 하제나우어와 고트프리트 젬퍼가 설계한 현재의 빈미술사박물관은 1891년에 완공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양식의 박물관 내부는 구스타프 클림트를 비롯한 여러 예술가의 그림과 조각품으로 장식되어 있고, 중앙 계단과 원형지붕 그리고 프레스코의 화려한 아름다움은 방문객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합스부르크의 통치자들이 수백 년간 수집한 예술품은 고대 이집트 중세와 근대 유물과 조각품에서부터 동전, 시계 악기, 전투 장비까지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특히 빈미술사박물관 2층에 있는 회화 갤러리에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 대가들의 그림 약 2200점이 전시되어 있다.


이번 서울의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96점의 회화와 조각, 공예품들은 16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합스부르크가의 황제들이 수집한 걸작들의 극히 일부다.


왜 왕, 왕비, 공주 초상화가 많을까?

사진이 없던 시절, 왕들은 자신의 모습을 남겨놓으려는 목적으로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초상화의 본질은 실용적인 이유지만, 왕의 초상은 단순히 개인의 모습을 남기겠다는 의도 외에 더 근본적인 목적이 있었다. 왕의 얼굴을 온 국민에게 널리 보여주는 동시에 왕의 통치를 합리화하고 왕다운 위엄과 권위를 과시하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었다. 절대왕정이 확립되기 시작한 16세기 이후, 유럽 각국의 군주들은 당대 최고의 화가를 뽑아 궁정화가의 지위와 명예를 안겼다. 선발된 화가들은 통치자의 권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초상을 그리기 위해 고심을 거듭했다. 빈미술사박물관이 소장한 군주와 왕비의 조상들은 힘과 위엄, 장대함과 현명함을 한 점의 초상에 모두 담기 위한 화가들의 고심 끝에 나온 작품들이다.


중매 수단으로써의 초상화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의 장녀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 초상화 3점 중  생기발랄한 5살 때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 이번에 전시되었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특별한 혼인 정책을 폈고, 영토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근친혼도 주저하지 않았다. 마르가리타도 어린 나이에 이미 외숙부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레오폴트 1세와 혼인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펠리페 4세는 2~3년 간격으로 딸이 성장하는 모습을 그려 빈으로 보냈다. 오늘날 같으면 직접 보거나 화상통화로 약혼자의 얼굴을 확인하겠지만, 당시에는 초상화가 왕실 간 중요한 중매 수단이었다.

 

권력보다 예술을 사랑한 왕, 대공(대군)들

오늘날 합스부르크가의 방대한 미술 컬렉션과 빈미술사박물관 건립과 개방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인물들이 있다. 막시밀리안 1세, 페르디난트 2세 대공, 루돌프 2세, 펠리페 4세, 레오폴트 빌헬름 대공, 마리아 테레지아(1717-1780) 여왕 등이다.


막시밀리안 1(1459-1519)

합스부르크-유럽이라는 공식을 만든 인물. 합스부르크 시대의 문을 연 인물이 바로 막시밀리안 1세다. 막시밀리안 1세가 막 황제가 됐을 무렵 오스트리아는 계속되는 전투로 재정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상황이었다. 당시 부르군트(부르고뉴 현재의 네덜란드, 벨기에 지역 인근)는 신성로마제국 백작령의 하나였다. 1477년 부르고뉴의 공작 용담공 샤를은 전사하며 딸 마리 드 부르고뉴에게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 1세와 혼인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용담공 사후에 부르군트 백작령을 차지한 사촌 루이 11세는 마리를 탑에 가두고 자신의 일곱 살 난 아들과 결혼할 것을 강요할 정도로 권력에 대한 야욕을 드러냈다. 마리는 막시밀리안 1세에게 패물을 챙겨 보내며 구원 요청을 했다. 막시밀리안 1세는 가문의 사비를 털어가며 마리를 구출하고 부르고뉴 계승 전쟁에서 프랑스와 싸워 승리했다. 척박하지만 전략적 요충지인 티를 물려받은 그는 중심 도시 인스브루크를 수도로 삼고 제국건설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막시밀리안 1세

막시밀리안 1세는 마리와의 결혼으로 부르고뉴 문화를 접하게 되면서 알브레히트 뒤러의 그림에도 매료됐다. 그는 권력을 영속하기 위한 수단으로 예술을 적극 활용했다. 계보, 문장 등을 활용해 권력을 시각화하고 자신의 지위와 권위를 널리 알리기 위해 책과 전단지 형태의 신문 등 당시의 첨단 매체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자서전을 쓰고 자신이 치른 시합, 모험담, 사냥에 관련된 일화를 묘사한 판화도 제작했다. 건축물에도 신경 썼다. 인스브루크의 랜드마크인 '황금지붕과 왕궁 망루에 장식을 설치해 자신의 위엄을 드러내고자 했다.


또 특이하게도 그는 무구에 조예가 깊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방어구의 역사>라는 책에선 그를 '갑옷 오타쿠'라 소개할 정도다. 다양한 갑옷과 보물을 수집했던 그는 예술가들을 비호하며 예술을 사랑한 기사이기도 하다. 이런 성향은 이어 소개한 그의 증손자 페르디난트 2세에게도 이어졌다. 막시밀리안 1세는 자신을 제왕의 이미지로 미화하기 위해 3권의 자서전과 <백색 왕이야기> 같은 전기를 간행하라고 지시했다. 이 속에 담긴 막시밀리안 1세의 이야기는 대부분 과장되거나 미화된 영웅담들이다.


페르디난트 2세 대공

페르디난트 2세 대공(1529-1595)

티롤 지방은 1140년 바이에른 공국에서 분리돼 타롤 제후 백작령이 됐다. 이후 루돌프 4세의 통치기이던 1369년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게 됐다. 타율은 로마제국 시절부터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오스트리아와 스위스를 잇는 지역이라 합스부르크 왕가에 의미가 남달랐다. 이런 지정학적 가치 외에 이 지역에 문화적 가치를 더한 인물이 바로 1564년부터 티롤을 통치한 메르디난트 2세 대공이다.


그는 11세기에 지어진 암브라스성을 르네상스양식으로 개조하며 최초의 박물관으로 꾸몄다. 막시밀리안 2세에게 갑옷과 예술품 사랑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그는 르네상스 시기의 갑옷, 무기, 예술품과 공예품을 수집해 암브라스성 안에 전시실을 따로 꾸몄다. 그리고 이 수집품들은 빈미술사박물관의 초석이 되었다.

세로 홈 장식 갑옷

갑옷과 무기를 사랑한 것에서 알 수 있듯 그는 '밀리터리 덕후'이자 전쟁광이었다. 당시 티롤 지역은 기독교 분파 간 다툼이 심했다. 이런 이유로 수집품 중에 기독교 관련 회화도 많다. 페르디난트 2세는 다양한 수집품을 통해 티롤 지역에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영향을 보여주는 다양한 예술 양식을 남겼으며, 메디치 가문 출신 아내와 함께 피렌체 중심의 대규모 이탈리아 예술 컬렉션도 구축했다.


전시실에는 갑옷과 무기, 초상화, 기독교 관련 회화를 비롯해 자연의 불가사의를 보여주는 귀중품, 자연물, 기계, 악기 등 다양한 수집품이 있어 장르를 가리지 않는 그의 왕성한 수집욕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고 있다. 페르디난트 2세 대공의 암브라스 성은 그 자체로 16세기부터 현재까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세계 최초의 박물관이다. 페르디난트 2세 대공은 가문의 일원이 아닌 아우크스부르크 출신 부르주아 필리피네 벨저와 결혼했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선물하기 위해 브라스 성을 개축했다.


펠리페 4세와 레오폴트 빌헬름 대공

펠리페 4세(1605-1665)와 레오폴트 빌헬름 대공(1614-1662)은 인스브루크가 아닌 빈이 문화 중심지가 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이다. 둘 다 당시 잘 나가던 예술가들의 주요 작품을 모아 방대한 회화 컬렉션을 완성했으며, 이후 이것을 빈으로 옮겨왔다.


펠리페 4세는 집권 후 과거 전성기를 누리던 스페인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신통치 않았다. 그러자 자신이 직접 통치하는 대신 총신에게 국정을 맡기고 자신은 예술 애호가로 살아갔다. 결국 국내 정치에 실패했고 대외적으로 벌인 전쟁에서도 패해 스페인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예술 후원가로서는 빛을 발했다.

펠리페 4세

펠리페 4세는 왕실 축제, 문학, 연극, 음악 등 폭넓은 예술장르를 지원했고, 그중 미술을 가장 좋아했다. 무려 800점이 넘는 작품을 구입했을 정도다. 벨라스케스는 펠리페 4세 치하에서 30년 이상 궁정화가로 일했다. 그는 루벤스와 벨라스케스도 후원했는데, 그중 궁정화가인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너무나 좋아해 자신의 초상화는 오직 벨라스케스만 그리도록 했다. 벨라스케스 역시 존경과 성실로 화답하며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군주와 화가의 우정을 꽃피웠다. 때문에 벨라스케스는 과로로 사망했다. 이렇게 남다른 사랑과 안목으로 예술을 적극 후원하여 스페인 황금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펠리페 4세는 ‘은의 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레오폴트 빌헬름 대공

페르디난트 2세의 막내아들 레오폴트 헬름 대공(1614-1662)은 30년 전쟁의 기사단장으로 임명받고 전쟁터를 떠돌며 살았다. 일생을 전쟁터를 전전하며 미혼인 상태로 48세에 사망했다.


그가 찾은 마음의 안식처는 바로 예술품이다. 네덜란드 총독으로 부임하던 시기에 이탈리아와 네덜란드 작품을 대거 수집한 명화광이었다. 전쟁 상황에서도 영국에서 진행하는 컬렉션 경매에 참여할 정도로 수집에 열을 올렸다. 소장품만 1400여 점에 달한다. 화가를 고용해 작품을 관리하도록 하고, 도판이 들어간 회화 소장품 목록을 만드는 등 관리에 많은 노력을 들였다. 그가 특히 좋아한 것은 베네치아화과 작품이다. 틴토레토, 베로네세, 티치아노 등 당시 베네치아파 대표 화가들의 인기 있는 작품만 쏙쏙 골라 모은 작품이 상당할 정도로 안목이 높았다. 루벤스와 함께 17세기 최고의 작가로 꼽히는 얀 브뤼헐에게 작품을 의뢰하기도 해 그의 작품을 여럿 남겼다. 레오폴트 빌헬름 대공이 수집한 이 작품들은 그의 조카인 레오폴트 1세가 빈으로 옮겨 오트리아 황실 소유가 됐다. 펠리페 4세와 레오폴트 빌헬름 대공이 남긴 스페인과 네덜란드| 명화들은 빈미술사박물관 회화관의 명성을 높이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루돌프 2세

루돌프 2(1552-1612)

내성적이고 타협할 줄 모르던 외골수 루돌프 2세는 엄격한 스페인 왕실에서 자랐다. 겉으로는 독실한 신자인 척했지만 내면엔 반항심과 기인의 면모가 자리하고 있던 펠리페 2세의 거대한 도서관에 파묻혀 살며 덕후의 기틀을 다져갔다. 이 덕분에 연금술을 비롯해 과학 수학, 예술 등에 관한 풍부한 자식을 쌓을 수 있었다.

펠리페 2세는 예술을 사랑했던 터라 유럽에서 유명한 화가나 장인을 스페인 왕실로 불러들여 공방을 차려주거나 궁정화가나 장인으로 삼고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를 어깨너머로 보고 배운 루돌프 2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된 후 수도를 프라하로 옮기고 펠리페 2세가 그랬듯 네덜란드와 이탈리아 예술가들을 프라하에 총집합시키고 뒤러, 라파엘로, 티치아노 등 당대를 풍미한 르네상스, 매너리즘 사조 작품을 대거 수집했다. 또 예술가, 장인은 물론 과학자, 수학자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을 불러들여 공방을 차려주거나 연구실을 마련해 주며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덕분에 당시 프라하가 있던 보헤미아 지방은 음악, 예술, 과학, 공예, 석공술의 중심지로 자리 잡게 됐다. 오늘날 합스부르크 왕가의 거대한 예술 사랑. 수집의 시초가 이 시기에 다져진 것이다.


루돌프 2세의 방대한 수집품 목록에 오른 것은 회화만이 아니다. 도도새 유니콘의 뿔, 노아의 방주에 있던 못 등 범인은 생각지도 못할 만큼 진귀한 것들이었다. 이런 수집품이 빈미술사박물관 공예관이 탄생할 수 있는 모태가 되었다. 또 그는 천문학자, 점성술사 철학자 등 이전에는 환영받지 못했던 인사들을 초대해 궁전에 머물게 하기도 했다. 이 덕분에 프라하는 더욱 경이와 신비로 가득한 도시가 되었고, 합스부르크 왕국의 방대한 예술품 사랑 또한 단단한 뿌리를 내리게 됐다.


마리아 테레지아

컬렉션을 대중들이 볼 수 있도록 개방한 유럽의 장모

마리아 테레지아(1717-1780) 여왕은 합스부르크 왕가 역사상 유일한 여성 통치자로, 아주 극적으로 왕위에 올랐다. 테레지아의 아버지 카를 6세는 아들을 두지 못한 상태였다. 이에 오스트리아를 노린 각국의 세력이 눈에 불을 켜고 덤비자 카를 6세는 통치 기간 내내 자신의 장녀 마리아 테레시아가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게 하려고 힘썼다. 결국 장녀가 왕위를 승계할 수 있게 국사 조칙을 공표해 주변국의 승인을 받았지만, 카를 6세가 죽고 나자 주변국들은 일거에 태도를 확 바꿨다. 결국 테레지아는 1740년부터 무려 8년간 왕위 계승 전쟁을 치러야 했다. 결국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관은 남편 프란츠 슈테판에게 돌아갔지만 사실상 제국의 통치권은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있었다. 또한 마리아 테레지아는 왕위 계승 전쟁의 과정에서 나름의 외교력과 정치력을 발휘해 슐레지엔 땅을 제외한 대부분의 영토를 지킬 수 있었다. 이 전쟁을 거치며 마리아 테레지아는 군의 근대화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고, 이후 나라의 근대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 예술을 이용해 권력을 선전했다. 자신의 대관식 광경을 그림으로 남기거나, 선대에 지어진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쇤브룬 궁전을 로코코 양식으로 개조해 검소하고 낭비벽 없는 여왕의 이미지를 전하려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의 어머니이자 유럽의 장모'로 통한다. 무려 16명의 자식을 낳고, 프랑스와의 화친을 위해 딸(우리에게 잘 알려진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녀의 막내딸이다.)들을 대부분 정략결혼을 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절절한 연애 끝에 결혼했다. 빈으로 유학 온 프란츠슈테판이 로맨스의 주인공. 슈테판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에 있었지만 정치에는 별로 관심이 없던 탓에 실질적 권력은 모두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있었다. 슈테판은 대신 대단한 수집벽을 지녀 온갖 광석과 동식물 등을 수집하며 현재 빈자연사박물관의 토대를 다졌다. 테레지아가 유일하게 연애결혼을 허락한 딸이 한 명 있었는데 첫째인 마리아 크리스티나다. 가장 아끼는 딸이라 특별히 연애는 허락했으나, 이번엔 아버지 슈테판이 반대했다. 그래서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결혼식은 슈테판의 사후에 진행됐고, 이번 전시회에서 만날 수 있는 '마리아 크리스티나 여대공의 약혼 축하연에는 추모의 의미로 검은 휘장이 드리워져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를 근대국가로 이끌었다. 조세제도를 개혁해 귀족과 성직자도 세금을 내게 했고, 화려한 교회 예식도 금지했다. 또 최초로 초등학교 의무교육을 실시했다.

마리아 테레지아 황제는 빈미술사박물관 설립에 결정적 역할을 한 계몽전제군주였다. 1776년 합스부르크 가문의 컬렉션을 대중에게 공개하면서 빈미술사박물관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근친결혼의 부작용, 부정교합 주걱턱

한때 유럽의 절반 가까이를 점령했던 합스부르크가는 자신들의 고귀한 핏줄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근친결혼을 고집했다. 합스부르크가 최상의 배필은 합스부르크가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문제는 이들이 유전법칙의 무서움을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잇따른 근친결혼으로 합스부르크가의 후손들은 대부분 유전병을 가지고 태어났다. 많은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사망하거나 요행히 유아기를 넘겨도 오래 살지 못했다. 합스부르크가의 유전병중 하나가 위턱과 아래턱 사이가 맞지 않는 부정교합이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초상들을 자세히 보면 이 부정교합의 흔적이 뚜렷하게 보이는 경우가 많다.


천재 화가들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 디에고 벨라스케스, 1656년경, 캔버스에 유화, 105x88cm

◇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를 보고 싶어 했던 황제 페르디난트 3세를 위해 그려진 공주의 초상이다. 스페인왕 펠리페 4세의 딸인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는 페르디난트 3세의 아들 레오폴트 1세와 정혼한 상태였다. 공주는 벨라스케스의 대표작 '시녀들'에서 보이는 것과 비슷한 드레스를 입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벨라스케스의 화법이 잘 드러나는데, 즉흥적으로 그린 듯 노련한 색채 기술을 활용해 까다로운 복식의 질감을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 스케치에 의존하지 않고 대략의 형상만 잡은 뒤 붓놀림 하나하나를 다양하게 활용해 표면의 두께, 농도 등을 달리 한 붓질이 특징이다. 그 당시에도 포토샵 기술은 존재했다. 벨라스케스는 공주의 다섯 살 생기발랄한 모습을 부각하기 위해 사랑스러운 얼굴 표정과 화려한 의상을 그만의 독특한 기법으로 묘사했다.    

꽃다발을 꽂은 파란 꽃병, 얀 브뤼헐 1세, 1608년경

◇ 얀 브뤼헐 1세

브뤼헐 가문에서 피터르 브뤼헐다음으로 중요한 작가이자 꽃 정물화로 유명한 피터르 브뤼헐의 둘째 아들 얀 브뤼헐의 작품, 소형 다작법, 정확함, 명료함, 절묘한 색채 조화로 '브뤼헐 진짜 꽃을 그린다’는 말을 낳았다.  참고로, 2명의 얀 브뤼헐 브뤼셀의 유명한 화가 가문인 브뤼헐가에는 2명의 얀 브뤼헐이 있다. 피터르 브뤼헐의 둘째 아들 얀 브뤼헐 1세와 얀의 장남인 얀 브뤼헐 2세다. 둘 다 주요 작가로 성장했는데, 피터르의 둘째 아들인 얀 브뤼헐 1세는 루벤스의 친구였고, 펠리페 2세의 딸 이사벨라가 선호한 화가였다. 얀의 장남인 얀 브뤼헐 2세는 레오폴트 빌헬름 대공에게 작품 의뢰를 받으며 말년에 부흥기를 누렸다.  

주피터와 머큐리를 대접하는 필레몬과 바우키스, 피터르 파울 루벤스,  1620-1625년경

◇ 피터르 파울 루벤스

인간으로 변장하고 마을을 방문한 주피터와 머큐리의 이야기를 그렸다. 거지로 변장한 이들 신을 유일하게 반겨준 이는 노부부 필레몬과 바우키스뿐이었다. 이 작품은 이후 필레몬과 바우키스에 관한 작품의 정석이 됐다. 루벤스는 이전의 도안을 참고하되 구성에 변화를 주고 극적으로 연출했다. 인물은 루벤스 공방에서, 정물과 동물은 네덜란드 화가인 프란스 스니더르스의 공방에서 그렸다.

   


바람난 신부를 둔 신랑, 얀 스테인, 1670년경

◇ 얀 스테인

결혼식 피로연에서 신부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음을 알게 된 신랑이 경악하는 순간을 담은 작품. 여관업을 겸하던 화가는 여관에서 만난 다양한 인간 군상을 작품에 담았다.

기름 부음을 받는 솔로몬, 코르넬리스 데 포스(1584-1651), 1630년경, 캔버스에 유화

◇  코르넬리스 데 포스(1584-1651)

밧세바의 아들 솔로몬이 다윗의 왕위를 물려받아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기름 부음을 받는 구약성경의 이야기 장면을 그렸다. 기름 부음은 왕위 계승 의식을 의미한다. 솔로몬은 화려한 대야 위로 몸을 숙이고 그 뒤로 어린 시종 두 명이 왕실의 상징인 홀과 왕관을 놓은 베개를 들고 서 있다. 뒤로 보이는 나선형 기둥은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솔로몬 기둥을 연상시키며, 기름 부음의 주인공이 솔로몬임을 나타낸다.    

이번 전시회 나들이에서는 주마간산으로 관람한 느낌이라 아쉬움이 많다. 기회가 된다면 한적한 시간을 택해 다시 한번 더 가봐야겠다.


<참고, 발췌, 인용>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100배 즐기기, 전원경외, 2022, 한경 arte

1. 제국의 영광을 담은 ‘어제의 세계’를 추억하다. 2022, 전원경, 세종사이버대학교 교수

2. ‘예술의 향연, 빈 미술사박물관 깊숙이 알기’, 2022, 라영균,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3. 매혹의 걸작을 만나기 전에, 2022, 양승미,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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