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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송목 Jul 26. 2023

28. 글쓰기의 최종 목적은 보여주는 것이다

사장의 책 쓰기

사람들은 글을 쓰고 싶어 한다. 왜 쓰고 싶어 할까? 글 쓰는 욕망의 뿌리는  어디이며 최종 지향점, 목적지는 어디일까? 여러 가지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확실한 걸 꼽는다면, 아마도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 것이다.  


자기  스스로 독자라 할 수 있는 일기조차도 결국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이다. 만약 안네의 일기, 난중일기 등 수많은 일기들이 지하실, 장롱 속에서 꽁꽁 감춰져 끝내 공개되지 않았다면? 하지만 그런 일기들은 결국은 세상밖으로 삐져나와 지금 우리들  모두가 보고 있다. 그 일기장의 주인들은 그의  내밀한 글이 이렇게 수 십 수 백 년 뒤에 공개되는 걸 예측이나 했을까? 예측했다면 천재이고 안 했어도 천재다. 왜냐? 결과적으로 지금 베스트셀러가 됐으니까.


그래서 일기든 메모든 언젠가는 세상에 나올 물건이라 생각하고 큰 마음먹고 써보자는 거다. 이때 세상에 내 의견을 내놓으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 바로  드러내는 용기다. 먼저 글을 공개하는 작은 용기부터 시작해서 사소하고 작은 주장을 해보고 나아가  큰 주장, 큰 명제, 세상 이슈로 차츰 접근해 보는 것이다.  사실 누군가로부터 평가는 받는다는 것은 기분 나쁠 수도 있고 두려운 문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평가를 받지 않는 발전은 이 세상에 없고 비평 없이 성장할 수 없다. 글쓰기는  이런 찜찜한 기분을 떨쳐내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내 글이  세상에 처음 남들 앞에 나온 것은 "한경에세이"다. 내가 대표이사로 있던 한국교육미디어가 코스닥 상장을 앞두고 한창 기업 IR에 열을 올리고 있을 즈음 한국경제신문에서 매주 한편씩 두 달 에세이를 기고해 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그때까지 글을 써 본 적도 없고 당연히 자신도 없었다. 곧 코스닥 상장심사를 앞둔 절박한 심정에서 혹 회사 브랜딩에 도움이라도 될까 하여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필진에 합류했다. 총 8편을 기고했는데 첫 편이 "816번째 관악산 등반"이었다. 천자(1000자)의 짧은 칼럼으로 무슨 주장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 느낌을 적는 건데 왜 그리도 문장 쓰기가 어려운지 일주일 내내 다듬고 만지작 그렸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한 번 공식적으로 내 지른 글은 기록으로 남고 잘된 글이던 비문이던 이후 나의  글쓰기에 있어 큰 디딤돌이 된 용기 있는 첫 발자국이었다. 그때 내 나이 45살이었다.


과거 나는 글쓰기와는 전혀 인연이 없었고 그 흔했던 백일장에 입상이나 이름(가작)조차도 올려도 해보지도 못했다. 나 자신 스스로도 그런 글재주의 흔적이나 낌새는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물론 그 점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별로 없다. 그런데 일부 지인들은 이런 나를 두고 글을 잘 쓴다고 한다. 물론 그들 시각으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프로그래밍하던 공학도인 데다 글 쓸 것 같지 않았던 사람이 글을 쓰고 있으니 쓴다는 자체로 칭찬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정확한 표현을 하자면 사실상 격려에 가깝다. 아직은 훌륭한 작가로서 칭찬을 받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아마추어로 봤을 때 훌륭하다는 뜻일 것이다.  


한편 나는 지금도 가끔 다른 사람들의 괜찮은 책이나 명품 칼럼을 읽으면 심한 좌절감을 느낀다. "언제쯤  나도 저런 멋진 글이 가능할까"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해박한 지식, 명문장, 설득력 있는 논리와 흐름의 글을 볼 때면 부러움과 심한 열등감을 동시에 느낀다. 특히 그 수준이 도저히 따라잡을 수없다고 판단되었을 때의 그 좌절감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로 인해 열흘 정도 컴퓨터 자판기 앞에 앉을 수 조차 없었던 적도 있었다. 마치 마라톤 경주에서 수많은 선수들 틈에서 저만치 적토마처럼 앞서 달리는 선수를 바라보는 그런 부러운 마음과 상당한 그 추월거리감에서 느끼는 넘사벽의 상실감과 열등감이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일류 글쟁이가 될 수 없다는 걸 나 스스로 잘 알고 있다. 물리적으로 출발선이 좀 늦은 감도 있고 아직 이렇다 할 재능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좌절로만 뒹굴고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그러고 보니 위로가 될 만한 장면도 보인다. 글쓰기라는 마라톤 대열을 뒤돌아 보면 나 뒤에도 많은 사람들이 뛰고 있다는 걸 보고 위안으로 삼는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말한 것처럼 비교는 불행의 시작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비교를 통해 위안을 얻을 수도 있다.


어떤 경기던 내가 꼴찌일 경우는 드물고 어디를 가나 대개는 나보다 못한 꼴찌가 존재한다. 뒤따라오는 선수를 바라보는 허세와 우월감을 임시변통으로 삼아 덮어보려 몸부림치는 것이다. 이게 어쩌면 지금 나의 글쓰기 본모습이고 동력일지도 모른다. 글쓰기는 결국 완벽할 수 없는 완성을 향해 달려가는 미완성의 노력이다. 그래서 지금은 많이 모자랄지라도 쓰고, 다듬고, 내보내기를 하면서 앞으로 전진하고 있는 것이다.  


육지의 끝은 바다의 시작이고, 바다의 끝은 육지의 시작이다. 세상의 끝과 시작은 맞물려 있다. 주어진 삶의 변화를 두려워할 시간을 갖지 말아야 한다. 죽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다시 태어나는 때이다. 완성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이 새로운 시작이다. 책 쓰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비행기가 가장 많은 에너지를 소모할 때는 이륙할 때라고 한다. 그러나 한번 이륙하기만 하면 양력으로 유지된다. 큰 힘들이지 않고 그냥 날아가는 것이다.


글쓰기도 그렇다. 처음 시작이 어렵지 한번 시작하기만 하면 그다음부터는 별 힘주지 않아도 그냥 설렁설렁 가게 되어 있다. 분명 새로운 도전이지만 한번 시작만 하면 언젠가는 끝나게 되어있다. 자신 스스로 확신하지 못하는 미래는 오지 않는다. 이제 시작했으니 '끝이 있다"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역사에서 그것은 꾸준히 증명되어 왔다. 시작한 모든 것은 끝난다. 책 프로로그를 쓰는 순간 당신의 책은 언젠가 출간될 것을 기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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