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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송목 May 13. 2024

그때 커피는 마시는 게 아니었는데...

엄마가 사라졌다

당시에는  인지  못하다가, 지나고 보니 모골이  송연해지는  일이  있다. 아!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중도에 깨달았지만  '그 분위기를  멈출 수 없었다'라고  표현하는 게 맞겠다.


엄마를  불태우기 위해  연소함 문을 '덜컹' 닫으면서 작별을  고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주어졌다. '이제  모든 게  끝났구나! 이제 영영  엄마가  불과 함께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구나' 이별절차의  마지막 순간 나는  갑자기  긴장이  풀어졌다.


덩그러니  화면만  있고  의자들이  일렬로  열서넛쯤  배열된  방으로 안내되어  들어갔다. 엄마가  불타는  동안 기다리는  대기실이다. 마치  병원에서  대기번호표 받아놓고  기다리는  자리 같다. 귀향길 귀경길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엄마 보러 오가며  익숙했던  공간이 오버랩된다. 몸만 실으면 목적지까지 그냥 데려다주는 시간여행 공간이다. 가는 버스 안에서 어떠한 동작도 '도착'이라는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그런 절대 공간이다.


죽음을 기다리는 공간은 좀 달라서일까? 어색해서일까? 적막감을 감당하기 힘들어였을까? 그냥 생활 습관이었을까?

어쨌든 그 순간 나는 막내조카를  불러  구내 커피를 사 오게 했다. '왜  거기에서 커피를  팔았을까?'나중에  생각한  궁금증이다. 야속함이다. 간판이 보여  샀을 뿐인데...

꽤나 긴 시간뒤 배달되어 온 그 커피를  우리들은 마셨다.

마시다, 화면을 보다가 갑자기 등골이 으스스 해졌다.


이 순간이  어떤 순간인가? 이 기다림이 어떤 기다림인가?

엄마가 불타고  있는 그 시간  아닌가?

엄마의 육신이 태워지고 있는데,  불타고 있는데...

나는  한가로이  커피 마시면서  커피 향을 맛보고 있다?


그 순간에도  화면에는  ○○○님  진행 중이십니다'라는  자막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

아직은  엄마가  타고 있지는  않구나. 태워지기  위해  대기하는구나. 애써 변명하면서도 나는 목구멍으로  커피를  부어 넣고  있었다. 의식하면서도 멈추기를 할 수 없었다.

애써 태연한 척.

하나의  삶이  사라지는  순간에도  세상은  각자의  본능과  습관과 쾌락을  유지한 채  관성대로  흘러간다.

 

사는 동안 가끔 누군가가 띄워놓은 드론 카메라를 느낄 때가 있다.

2차원에서 3차원의 시선을 의식하는 순간이다.

2차원 공간에 흠뻑 취해있던  '나'가 3차원 공간의 또 다른 시선의 '나'를  발견하흠칫하는 순간이다.


순간 부끄럽기도  하고,  죄송하기도 하고,  흐름에 충실한  본능이  가증스럽기도  하고, 식은땀이  쫙  스쳐 지나갔다. 

아!  삶의 호흡이라는 게  이런 건가?

살아있는 존재에게 타인의 죽음이란  이런 정도  분량인가?

울며불며  이별을  아쉬워해도  결국은 이기적이고 본능적인 능선을 뛰어넘지 못하는구나.

지금까지 나를 존재하게 했던 위대한 정체성 '나'

그 '나'가 나의 테두리가 되어 나를 가두고 있구나.


지금 나에게 다가 온 슬픔의 본질은 무엇일까?

타인의 시선을 위한 위선인가?

이기적 기반의 확대된 자아의 일부 상실에 대한 슬픔인가?

자녀를 의식한 나의 미래를 위한 보험인가?

3차원의 차가운 시선인가?

한 순간 찾아온 4차원 사랑의 측은함인가?


죽음은 죽음일 뿐,

슬픔은 슬픔일 뿐,

커피는 커피일 뿐...

스스로  애써 면죄부를  발행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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