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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같은 회사, 그 따뜻함의 그늘

”厚而不能使, 愛而不能令 (후이불능사, 애이불능령)

by 최송목

‘가족 같은 회사’ 중소기업을 방문하다 보면 흔히 듣는 말이다. 듣기엔 따뜻하고, 괜찮은 경영 철학처럼 들린다. 사장이 직원들을 잘 챙기고, 서로를 아끼는 분위기에서 생겨난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냉정히 말해 그것은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이자, 때로는 책임질 수 없는 말이다.


기업은 매출과 이익을 위해 인위적으로 결합된 조직이다. 반면 가족은 혈연으로 주어진 공동체다. 기업은 수익이 사라지면 해체되지만, 가족은 이익이 없다고 헤어질 수 없다. 직원은 계약이 끝나면 떠날 수 있지만, 가족은 계약으로 맺어진 게 아니다. 이 차이를 혼동하면 불필요한 상처나 오해가 생긴다. 또한 ‘가족처럼’이라는 말이 오히려 관계를 흐리게 할 수 있다. 너무 가까워지면 예의가 사라지고, 감정이 앞서며, 때로는 존중심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친구 사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가끔 거친 말을 많이 할수록, 예의를 생략할수록 친밀하다고 착각하거나 우정이 깊은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초중고 친구들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어느 정도는 수긍가는 말이다. 하지만 관계가 좋을 때는 괜찮겠지만, 관계에서 틈이 생기면 그런 사이일수록 더 쉽게 막말이 오갈 수 있다.


부부간도 예외는 아니다. 신혼 초에는 서로 잘해주려고 노력하고 존중하지만, 중년 이후에는 차츰 긴장도 풀리고 너무 잘 아는 것으로 착각하여 예의를 생략할 때가 많아진다. 평소 아무렇지도 않게 쓰던 반말, 오히려 다정함의 도구로 쓰이던 하대가 부부싸움으로 비화되면 막말로 가기는 쉬워지는 통로가 된다.


가족 간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흔히 사람들은 ‘가족끼리인데 뭐 어때’ 하면서 아무렇게나 말을 던지고 존중심 없는 태도로 대하는 경향이 있다. 부모가 결혼하고 장성한 자녀를 여전히 아이처럼 함부로 대한다거나, 자기 소유물 대하 듯 명령하는 경우도 그렇고, 아들딸도 유년시절 엄마 아빠 대하듯 부모에게 막 대하는 경우도 그렇다. 이 모두 상대에 대한 존중심 결여와 반말로 인한 결과가 대부분이다. 또한 세월의 변화를 인식하지 못한 채 예전 감정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같은 사람이라도 시간과 환경에 따라 변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회사가 직원을 가족처럼 대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상황이 좋을 때만 가능한 말’이다. 회사가 어려워지고 구조조정이 필요할 때, 그 말은 잔인한 모순이 된다. 피도 눈물도 없는 ‘철(鐵)의 경영자’로 불리는 잭 웰치는 ‘함부로 직원을 사랑하지 말라’라고 했다. 냉정해서가 아니라, 잘못된 친밀감이 결국 더 큰 상처를 낳기 때문이다.

이미지 = 통로

손자병법에도 비슷한 통찰이 있다. “병사를 후덕하게만 대하면 노역을 시킬 수 없고, 사랑하기만 해서는 명령을 내릴 수 없다”厚而不能使, 愛而不能令 (후이불능사, 애이불능령) 인간적 감정의 친밀함만으로 조직을 이끌어 갈 수는 없다. 시스템과 원칙 위에 감정을 얹어야 조직이 움직인다.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소스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을 대할 때는 불을 대하듯 하라. 다가갈 때는 타지 않을 정도로, 멀어질 때는 얼지 않을 만큼만.” 조직과 사람의 관계도 이와 같다.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게. 그 미묘한 거리를 지킬 때, 조직은 오래도록 따뜻하면서도 단단한 힘을 가진 ‘지속 가능한 기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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