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사물알(歸師勿遏), 궁구물박(窮寇勿迫)
우리는 흔히 완벽한 결과를 추구하며 미완의 상태를 불안하게 여긴다. 하지만, 때로는 미완의 모자람이 리스크를 줄이는 안전망이 될 수 있고, 여백이 되어 오히려 더 큰 완성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손자병법의 ‘귀사물알(歸師勿遏)’, 즉 돌아가는 군사는 막지 말라는 전략이 여기에 해당한다. 완벽하게 승리하려는 집착은 순간의 만족은 채워주지만, 리스크를 키우기도 하고 장기적으로는 어렵게 이룬 승리를 망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에서 완벽에 도달하려다 생기는 갈등은 흔히 있는 일이다. 기업이나 공인이 사과문을 발표하면 사람들은 ‘완벽한 사과’를 요구하며 진정성을 끝없이 따진다. 특히 이해관계자가 다수인 비즈니스에서 완벽한 사과란 존재하기 힘들다. 과도한 압박으로 불필요한 논란을 야기하거나 강력한 반발로 사과자체가 유야무야 되기도 한다.
가까운 관계도 다르지 않다. 부부나 연인, 친구 사이에서 누군가 용기 내 사과해도 상대가 너무 집요하게 따지거나 이야기가 길어지면, 사과가 퇴색되면서 상대에게 모욕감만 남길 수 있다. 결국 자존심까지 건드려 회복하기 어려운 국면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완벽을 향한 집착이 상대의 퇴로를 막고 숨통을 조이는 것이다.
조직운영에서도 완벽주의는 흔하다. 회의에서 작은 실수나 지연이 생겼을 때, 완성도의 추궁이 반복되거나, 공개적인 질책, 완벽한 해명 요구가 잦아지면 두려움으로 조직이 경직되거나, 반감이 깊어질 것이다. 겉으로는 완벽한 회의 진행으로 깔끔하게 보이겠지만, 사기는 꺾일 것이고 창의적 시도는 점차 사라질 것이다.
손자의 ‘궁지에 몰린 적을 너무 몰아붙이지 말라’는 궁구물박(窮寇勿迫)도 같은 맥락이다. 누구나 벼랑 끝에 몰리면 필사적으로 저항하기 마련이다. 상대를 완전히 굴복시키는 일은 순간의 기쁨은 되겠지만, 결국은 관계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독이 된다. 돌아갈 퇴로를 터주는 것은 적당히 넘어가자는 의미가 아니다. 상대의 자존심을 세워 주며 물러날 여지를 주면 더 큰 승리를 얻을 수 있다는 ‘전략적 여백’이다.
성경 또한 지나친 완벽주의의 위험을 경고한다. “너무 의롭게 되지도 말고, 지나치게 지혜롭게 행동하지도 마라 (전도서 7:16)” 이것은 옳음이나 지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지나치게 옳다고 생각하는 교만과 모든 것을 안다는 지혜의 독선을 경계하라는 뜻이다. 과도한 의로움과 지혜의 과시는 자신에게는 옭아매는 무거운 짐이 되고, 타인에게는 피로감을 준다.
예컨대 공중목욕탕에서 매너 없는 행동을 즉시 고치려 들거나, 길거리의 청소년들을 보이는 대로 당장 ‘바로잡으려’ 들면 오히려 소동만 일으킨다. 겉으로는 정의감 있는 행동처럼 보이지만, ‘내가 옳다’는 과도한 확신의 의로움은 아닌지, 지나친 참견의 ‘오지랖’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때로는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는 절제도 미덕이고 큰 지혜다.
결국 승리의 핵심은 ‘누가 완벽히 이겼는가’의 완승이 아니라, 관계를 깨지 않고 다음 단계의 승리를 위해 여지를 남기는 것이다. 때로는 불완전한 마무리가 궁극적 승리의 기반이 될 수 있다. 살아가면서 게임은 한 번이 아니라, 계속되기 때문이다.
‘정상’이라는 완승의 유혹과 쾌감에 도취되지 않고, 상대 자존심을 세워 주는 여유, 돌아설 수 있는 ‘작은 틈새’ 그 절제와 배려가 바로 ‘미완의 美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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