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동욕자승(上下同欲者勝), 시졸여애자고가여지구사(視卒如愛子 故可與之俱)
2026년 2월 4일 전라남도의 한 지자체장이 인구 소멸 대책이라며 “외국인 처녀 수입”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논란이 됐다. ‘수입’이라는 단어는 원래 공산품이나 농산물을 들여올 때 쓰는 말이다. 사람에게 붙이기에는 지나치게 차갑고 거친 표현이다.
이런 류의 발언을 접할 때마다 사람을 하나의 인격이 아니라 ‘필요한 기능’으로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인간관을 돌아보게 된다. ‘처녀 수입’이라는 표현이나 이주노동자를 특정 사업장에 묶어두는 정책 논란을 보면, 사람을 하나의 수단이나 자원처럼 바라보는 시선이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 남아 있음을 느끼게 된다. 문득 이런 우려도 든다. 그 시선이 우리 삶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인 ‘부부 관계’에도 스며들어 있지는 않을까.
사람을 존엄한 존재가 아닌 자신의 부족함을 메워줄 ‘보충재’나 ‘수단’으로 보는 시각은 관계를 병들게 하는 치명적인 독소다. 과거 가부장적 사회에서 아내를 단순히 ‘빨래와 밥을 하고 아이를 기르는 사람’으로 규정하거나, 오늘날 배우자를 ‘돈 벌어오는 기계’ 혹은 ‘사회적 체면을 세워줄 장식품’으로 대하는 태도가 그러하다. 상대를 고유한 세계를 가진 동반자가 아니라 나의 필요를 위한 도구로 바라보는 순간 관계는 균형을 잃고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 지점에서 《손자병법》 모공편의 한 구절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상하동욕자승(上下同欲者勝).” 장군과 병사가 같은 뜻을 가질 때 승리한다는 뜻이다. 오늘날 부부 관계는 과거와는 달리 ‘상하’의 위계로 규정될 수 없다. 핵심은 위계가 아니라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마음의 일치에 있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이 말은 오늘날의 부부 관계에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다.
부부는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두 사람이 만나 하나의 가정을 함께 꾸려가는 공동체다. 만약 한 사람의 욕망이 다른 한 사람의 희생을 전제로 하거나, 서로가 바라보는 미래가 완전히 다르다면 그 가정은 오래 버티기 어렵다. 부부의 결속은 서로의 욕망을 억누르는 데서가 아니라 그것을 인정하고 ‘우리의 목표’로 모으는 데서 시작된다.
《손자병법》 지형편(地形篇)에도 비슷한 통찰이 등장한다.
“시졸여애자 고가여지구사(視卒如愛子 故可與之俱死)” 병사를 자식처럼 아끼면 그들은 죽음까지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구절의 핵심은 명령이 아니라 자발성이다. 사람은 강요에 의해 헌신하지 않는다. 존중과 신뢰 속에서 스스로 헌신을 선택할 뿐이다.
현대 사회에서 자주 등장하는 ‘졸혼(卒婚)’은 바로 이 자발적 결속이 무너진 결과다. 겉으로는 혼인 관계를 유지하지만 심리적으로는 이미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상태다. 그것은 상대를 동반자가 아니라 가정 유지의 도구로 느끼게 될 때 선택하는 하나의 탈출구다.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 일터에 오래 머물고 싶은 노동자는 없다. 존중받지 못하는 가정에 머물고 싶은 배우자 역시 없다. 사람은 존중받는 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그때 자발적인 헌신이 시작된다. 이제 우리는 부부 관계의 방식 자체를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낡은 잣대 대신 존중과 동반자 의식이 그 자리를 채워야 한다. 배우자는 나의 부족함을 메우는 도구가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는 하나의 독립된 인격이다.
부부는 한쪽이 상대를 수단 삼아 끌고 가는 ‘연행’으로는 오래갈 수 없다. 서로의 존엄을 지켜주는 ‘동행’이 될 때 비로소 ‘상하동욕’이 이루어진다. 그때 그들의 내일에는 의무의 겨울이 아니라 사랑의 봄이 찾아온다. 사람은 존중받는 곳에 머문다. https://www.todaymild.com/news/articleView.html?idxno=28557
<참고 인용>
1. 무등일보, 뉴시스, "외국인 처녀 수입" 김희수 진도군수 발언 '후폭풍'
2. 원옥금, 중앙일보, 이주민은 물건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