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단이 목적이 될 때, 우리는 무엇을 잃는가?

지자지려 필잡어리해(智者之慮 必雜於利害), 필이전쟁어천하(必以全爭於天下)

by 최송목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많은 경우 현실적인 필요로 결혼하기도 한다. 또 건강을 위해 운동하지만, 어느 순간 ‘운동을 위한’ 운동이 되어 일상을 잠식하기도 한다. 최근 건강이라는 어젠다에 우리의 일상이 매몰되어 가면서, 운동 기록과 체지방률 같은 숫자가 삶의 기준이 되고 있다.


건강을 챙기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수단이 목적처럼 자리바꿈을 하면 삶은 서서히 뒤틀리기 시작한다. 이런 수단과 목적의 전도가 가장 빈번하게 일어나는 현장이 바로 경영의 세계다. 단기 실적이라는 숫자를 위해 구성원의 희생이나 고객의 신뢰를 도구화할 때, 경영은 차가운 AI의 알고리즘과 다를 바 없어진다. 숫자가 인격을 대신하고 효율이 인간관계를 앞지르면서 기업문화는 점차 건조해지고 황폐해진다.


이점에 대해 손자는 《손자병법》 구변(九變)편에서 ‘지혜로운 자는 반드시 이익과 해로움을 함께 고려한다(지자지려 필잡어리해, 智者之慮 必雜於利害)’라고 했다. 여기서 ‘섞을 잡(雜)’ 자는 달콤한 과실(利)을 얻는 순간에도, 그 이면의 소외와 부작용(害)을 동시에 살펴야 한다는 경고다. 성공이라는 이익에만 취해 그 과정에서 인간의 존엄이 마모되거나 신뢰가 붕괴된다면, 그 성공은 결국 치명적인 독(毒)이 되어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이다.


손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진정한 승리는 상대를 파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보존한 채 이기는 것(필이전쟁어천하, 必以全爭於天下)’이라고 하였다. 상대를 깨트려 이기는 ‘파(破)’의 승리가 아니라, 나와 시장의 생태계를 잘 보전하면서 이루는 ‘전(全)’의 승리다.


내 집 마련은 서민들에게 간절한 희망이다. 본래 집이란 삶을 보호하는 따뜻한 울타리여야 마땅하지만, 그 울타리를 얻기 위해 현재의 삶을 과도하게 희생한다면, 그것은 희망의 집이 아니라 삶을 옥죄는 공간이 될 것이다. 강남 학군을 위해 상가 지하방의 습기를 견디고, 청약 가점을 높이기 위해 폐가에 가까운 환경을 버틴다면, 이는 수단이 목적을 집어삼켜버리는 행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손자가 경고한 ‘해(害)’는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집 한 채라는 이익(利)을 위해 가족의 건강과 현재의 웃음을 저당 잡히는 순간, 삶에서 가장 본질적인 가치를 포기하는 것이다.


건강을 챙기는 것도 마찬가지다.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자녀가 정성껏 차려낸 부모의 식탁 앞에서 “저탄고지”를 운운하며 까탈스럽게 숟가락을 가린다면, 그것은 탄수화물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엄마의 따뜻한 사랑을 밀어내는 것이다. 건강수치는 어느 정도 개선할지는 모르나, 오랜만에 가지는 가족의 화기애애함을 놓치는 것이다.


건강, 돈, 성공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 오래, 더 깊게 교감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기계처럼 오래 수익을 내기 위해 경영하는 것이 아니듯, 단순히 오래 버티기 위해 건강해지려는 것이 아닐 것이다. 진정한 성공은 사람답게 살기 위함이며, 사랑하는 이들과 더 나은 세상을 공유하는 것이다. 수단은 삶을 지탱하는 지팡이일 뿐,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적지는 그 너머에 있다. 언제나 목적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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