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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송목 Jul 08. 2022

야합(野合)

관심 있는 단어 36

나는 인간들이 사랑한다는 미명으로 장난감처럼 다루고 있는 애완견이.

인간들은 에둘러 나를 미화하려 든다. 언어의 성찬으로 나를 달래려고 한다. 말과 행동이 다른 그들은 진정성 결핍이다. 어쨌든 나는 개다,  '개OO'같은 수식어 없이 그냥 '개'로 불러주기만 해도 고마울 따름이다.  


그런 우리 개들에게도 '결혼'이라는 단어는 없지만, 그런 행동은 있다. 인간들처럼  로맨스도 연애도 웨딩마치도 기념일도 없지만,

잠깐의 꼬리 흔들기와  냄새 맡기, 짝짓기 가 있다. 하지만, 그러고 바로 이별이다.


우리에겐 인간처럼 탐색의 타이밍도 장소도 상대 선택권도 없다. 모든 게 인간들에 의해 주어질 뿐이다.

그냥 사람 이끄는 대로 가서 순간의 만남에  본능적으로 충실한다. 이 모두가 네들이 벌인 일이다.

지들이 다 시켜놓고는 지들이 흉본다. '야합'이라고.

잠깐 들판 소풍길에 살짝 사랑 나눈 걸 가지고  ‘야합’이라 비꼰다. 쏙닥쏙닥 자기의 이익이나 쾌락을 추구하는 말로 왜곡하여 우리 개들의 밀당을 부끄럽게 한다


인간에게 야합(野合)이란 무엇인가? 인간들이 말하는 '야합'이란 사전적 의미로 '좋지 않은 의도로 어울리거나 일부일처제에 반한다' 뜻이란다. 사실 우리에겐 인간들처럼 따로 즐길 그런  호텔이 없어서 들판을 택했을 뿐이다. 인간들이 온갖 호들갑 떨며 사랑을 빌미로, 결혼을 빌미로 호텔 갈 때, 우리 개가 맘 맞는 짝과 야외에서, 골목에서 꼬리 좀 흔드는 게 과연 그리도 손가락질할 일인가? 인간들은 우리들의 신성한  용어 '야합'을 함부로 쓰는 것 같다.


나, 개 눈엔 인간들의 결혼은 거대한 신기루다. 거창하게 웨딩이라 부르는 식도 올리고 기념 여행도 가면서 온갖 친인척 이웃까지 불러 부산을 떤다. 또 온갖 희로애락을 결혼이라는 바구니에 쓸어 담아 놓고 나서, 지지고 볶으면서 살아간다.


결혼이라는 거창한 파티 간판 아래 너무 많은 메뉴가 있다. 짝짓기 파트너,  친구, 비즈니스 동업자 등으로 M&A도 하고, 노후대비 스폰서까지 겸하는 일석사조의 다목적 다용도 기획의 산물이다. 한꺼번에 동시다발로 여러 가지를 하려다 보니 잘도 균형이 깨지고 틈이 생긴다. 만나는 조건이 넷이니 헤어지는 이유도 이다. 욕심쟁이 바보짓인지 아니면, 알면서 의례적으로 전통 삼아하는 조상과 신에 대한 복종 인가. 그들 스스로도 잘 모르는 것 같다.


 꿴 구슬  중 하나라도 깨지면  못쓰게 되는 아슬아슬한 장식품. 가지지 않을 땐 아쉽고, 가지고 나면 머리가 무거워지는 어쩔 수 없는 시간의 선택이다.  혼기라는 게 있기 때문이다. 시작은 창대하고 화려하지만, 끝은 잔잔하고 허들로 가득하다. 시간 갈수록 탈락자들이 속출한다. 그래서인가 길거리 오가는 절반이 헤어진 자들이다. 그렇거나 말거나, '짝지어라, 결혼해라' 목청 높여 외쳐대는 두눈박이 어르신들.

도전인가, 전통인가, 필수인가, 허들인가, 본능인가, 숙명인가, 이도 저도 아니라면 무언가의 관문인가?


인간 결혼은 반드시 포장해야 상품가치가 있다. 사랑이라는 호르몬으로 달콤하게 시작하지만, 인내라는 랩으로 꽁꽁 동여 매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인간들은 포장의 대가들이다. 본능을 이성으로 꽁꽁 누르고 이쁘게 포장하는 걸로 평생을 살다가는 게 익숙해진 존재들이다. 하지만, 아무리 이성적인 척, 아무리 포장지로 감싸도 필시 포장지가 닳아 없어지는 날 올 것이다. 그 성질머리 터지는 날, 페로몬이 넘쳐 넘쳐 삐져나오는 날, 소진하여 없어지는 날,  세 날 모두 사람이 개 되는 날이다.


인간들은 자기 자식, 자기 핏줄, 조상 족보, 민족, 혈통 엄청 따진다. 바로 눈앞 와이프 남편 자식 가까운 사람조차 잘 챙기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평소 사이가 그리 좋지  않다가도 남들 볼 땐 무척 다정스러운 포즈다. 사진 찍을 때만 스마일이다. 그래서 다들 얼굴 두께가 두꺼워지나 보다.


우리 개들 결혼은 인간과는 사뭇 다르다. 우린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위대한 번식 행위의 의식을 치른 것일 뿐이다. 인간들처럼 돈, 상속 등 그런 분란도 없다. 우린 거창한 수식어 다 빼고 그냥 교미일 뿐이다. 과정도 결과도 단순 명료, 그런 측면에서 우린 꽤나 이성적이다. 일종의 의무 의식 같은 것이다. 보긴 좀 그렇지만.


우린 만나고, 볼일 보고, 미련 없이 바로 이별이다. 몇 달 뒤 골목길에서 내가 낳은 내 새끼 만나도 모른 척한다. 아는 척해봐야 소용없기 때문에 애써 외면한다. 다 인간들 때문이다.

우리 개들은 무자식 상팔자다. 서류상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사실 우리 개 호적에 공식적으로 등록된 자식은 1도 없다. 낳아도 낳아도 인간들은 잘도 팔아 치우고 버리기 때문이다.  낳기는 우리가 낳지만, 키우고 처리하는 건 인간들이다. 인간들은 개를 키운다고 얘기하지만, 실은 우리 개가 인간을 보호하고 필요로 한다.

그들은 우리 개 무자식 유지의 일등공신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로부터 우리 개를 일컬어 '개팔자 상팔자'라 한다. 이 모두 인간들이 그리 해준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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