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송목 Dec 09. 2021

상황 vs. 정황

비슷 다른 궁금한 단어 s

 

대부분의 인간관계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 고로 우리는 ‘믿음’에 민감하다. 그런데 이때 우리는 무엇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나? 말을 믿어야 하나 아니면 행동을 믿어야 하나? 이력, 태도, 주변, 가진 돈, 권력, 사업규모? 도대체 뭘 보고 믿음을 판단해야 하나? 니면, 상황을 믿을까, 정황을 믿을까?

영화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2016)에서 한재호(설경구)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을 믿지 말고 상황을 믿어라”


 그런데 ‘상황’은 뭐고 '정황'은 무엇인가? 

국어사전에 보니 ‘상황(狀況)’은 ‘일이 되어 가는 과정이나 형편’이라 하고, 정황(情況) ‘일의 사정과 상황’으로 설명하고 있다. 뜻풀이만 보면 무슨 되돌이표 같은 느낌의 해석이라 혼돈스럽다.   


우리와 환경이 다른  외국인들도 이런 구분의 고민이 있을까? 내친김에 영어로 '상황'에는 어떤 표현들이 있을까 싶어 찾아봤다. situation, circumstance, condition, position 등 일곱 가지 정도로 세분되어 있다. 한글에 영어 표현을 더하니 좀 더 다양한 뉘앙스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1) sitution은 어떤 것이 발생하는 ‘상황’을 뜻하는 가장 일반적인 단어다.

2) circumstance는 어원은 라틴어 circum(주위에 둘러)+stare(서다)이며 (보통은 복수로, circumstances) (부대) 상황, 환경, 주위의 사정 요인, 일의 형편 따위를 뜻한다. 즉, 일, 사건들과 관련된 주변의 상황이라는 뉘앙스를 가진다.

3) condition은 사람, 사물, 재정 등이 처해있는 특정한 상황이나 상태다. 복수 형태인 conditions는 (생활, 작업 등의) 환경, 상황, (물리적 환경) 즉 (특정시기의) 날씨 등을 나타낸다. 또한 몸의 건강상태나 (신체 국부의) 이상, 병, 통증 등의 뜻으로도 쓰인다.

4) position은 권력, 힘, 권위 등 영향력과 관련된 위치나 처지, 입장이라는 뉘앙스가 있다. 또한 (특정 주제에 대한) 입장, 태도 등의 뜻으로도 쓰인다.

5) the case어떤 일이 되어 가는 실정이나 그것에 영향을 주는 사실을 의미한다.

6) state of affairs는 state(상태)+ affair(사건) 즉 어떤 사건에 대한 현재의 상황이나 정세를 뜻한다.

7) environment는 어원이 en(안에서) + viron(돌다) + ment(상태)이다. surroundings가 물리적 환경이라면, environment는 사람의 감정에 대한 관점이다. 즉, 개인이 생활하거나 일하는 환경에서 사람의 행동, 일의 전개 등에 영향을 미치는 상황을 말한다. 이외에도 (자연) 환경, 컴퓨터 환경 등의 뜻으로도 쓰인다.


나열하고 보니 무슨 영어 단어 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상황'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다양하게 적용되는 게 놀랍다. 우리 한글사전에도 이런 구체적이고 상세한 설명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생긴다.

<대부, 1972>

'상황'의 의미에 대해서는 영어를 통해 어느 정도 설명된 것 같으니 '정황'으로 넘어가 보자. ‘상황’과 ‘정황’은 비슷한 말로 쓰이지만, 두 단어가 지니는 의미의 폭과 밀도는 많이 다르다.


'정황'의 가장 전형적인 사례는 마피아 영화 ‘대부(The Godfather)’에 나온다. 우연히 마주치는 상황이 두 번 이상 연속으로 포착된다던지, 그 상황의 최대 수혜자가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는 장면이 포착될 경우 앞뒤의 '정황'으로 상대가 간을 보고 있는 건지 확실히 배신했는지를 즉각 판단 결정한다.  


이때 그들은 요즈음 우리네 법정 다툼처럼 지루하게 어떤 증거 제시나 긴 변론, 변명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돈을 주고받는 상황과 상대방 움직임의 정황만으로 그것이 뇌물인지 배신인지 거래인지 즉각 판단을 내리고 처단한다. 대개는 적이든 부하든, 누구든 당사자의 해명 없이 정황만으로 판단한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관전 포인트도 거기에 있다. 시청자들은 그 미친 속도감에 소위 '사이다'를 느낀다.


거기에 비하면, 요즈음 우리네 법정은 한가롭고 하세월이다. 한마디로 '고구마'다. 이런 국민들의 민심을 모를 리 없을 텐데 국회의원 등 힘 있는 권력자들은 '모르쇠'로 일관하다 증거가 나와도 겨우 인정하고 이마저도 세월이 한참 지나다 보니 피해 당사자는 이미 만신창이가 되고 난 후다. 법정도 논리와 증거주의에 매몰되어 '정황'을 외면하다 보니 솔로몬의 명판결은 전설이 된 지 오래다. 증거주의로 억울한 피해자 한 사람을 구제하려다가 '법꾸라지'들만 득세하는 세상이 되었다.


흔히 우리는 돈을 떼먹는다거나 상대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것만 배신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마피아 세계에서는 상대방(적)과 거래하는 것 자체만으로 배신이라 간주하고 즉각 처단한다. 당사자입장에서는 다소 억울할 수도, 오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본질을 파악하는 데는 생각보다 그렇게 많은 증거와 논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다. 지금 세상은 증거주의로 법정은 만신창이가 되어 사악한 자, 권력자들의 놀이터가 되어버렸다. 세상 드라마는 이를 반영이나 하듯   '친절한 금자 씨',  '모범택시', '빈센조', '천 원짜리 변호사', '더글로리' , '이로운 사기' 등 복수극이 인기를 이어가고 있다.  


'정황'은 행동과 상황이 시간 경과로 축적되어 표시되는 일련의 콘티 같은 것이다. 그래서 상황이 눈에 보이는 펙트라면, 정황은 보이지 않는 추론도 포함한다. 상황이 시간의 단면이라면 정황은 여러 개 복수의 ‘상황’을 길게 연결해 놓은 스토리 보드 같은 것이다. 말할 때 순간(시간)의 상태와 그 후 행동의 진행상태가 시간의 흐름을 타고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나타내 주는 것이다. 일관성을 유지하는지, 반복의 리듬을 타는지, 전혀 다르게 반전이 있는지다. 정황은 논리의 변화나 상태가 될 수도 있고 감성의 상태가 될 수도 있으며 때로는 이성과 감성의 뒤섞이는 융복합의 상태로 표현되기도 한다. 즉, 일정 시점의 단면은 ‘상황’이 되는 것이고 미래를 포함하는 전체 시공간의 국면이 ‘정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말보다는 상황을, 상황보다는 정황으로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눈앞 보이는 상황만을 보고 순간의 판단을 해야 하는 현실에서 우리는 그런 긴 사이클의 ‘정황’을 수용하고 판단할 안목을 가지기가 쉽지 않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상대방이 하는 말을 믿고, 서류를 믿고 그다음 행위의 상황 단면만을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인간은 늘 되돌이표 판단의 오류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 실패를 충분히 배우고서도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는 것이다.


선거철만 되면 후보자들은 늘 그랬듯이 번드르르한 공약을 남발하고 웃고 악수하고 사진 찍고 여기서 이 말하고 저기서 저 말하고 당선 후에는 나 몰라라 하는 행동을 반복한다. 그럼에도 후보의 세치 혀 감언이설과 언론의 홍보 전략에 우리는 스르르 넘어간다. 대통령, 국회의원, 시의원 등 선거를 수없이 치르고 경험했건만 때마다 거짓과 선동은 반복되고, 그들은 매번 속이고 우리는 매번 속는다. 그가 능숙하고 나쁜 걸까? 우리의 상황 판단 능력이 잘못 작동하고 있는 걸까?

사업에서도 지난번과 똑같은 수법에 또 시기꾼에게 당하고, 종교에서도 사이비 교주가 지난 수십 년간 수십 명이 비슷한 구호로 반복 출현했지만, 비슷한 행태로 당하고 있는 것은 순간의 상황에만 몰입하여 전체 콘티 스토리보드의 정황을 읽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상황에 매몰되어 정황을 놓치는 것이다.


상황은 짧은 순간의 시간이고 정황은 몇 가지  복수상황의 기간이다. 상황은 구간이 짧지만, 정황은 시간의 폭이 비교적 길다. 상황은 미시적이지만 정황은 거시적이다. 상황은 짧은 호흡이지만, 정황은 긴 호흡이다.  



작가의 이전글 집 마련했어요 (16畫)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