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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 년 지기 친구

수필

by 보리


이십 년 지기 친구 /이현영

찻주전자를 만난 지 어느덧 이십 년이 지났다. 천냥백화점나 DC마트라는 간판을 올린 잡화점이 성업 중일 때였다. 친구도 유행 따라서 가게를 열었는데 그곳에 찻주전자가 있었다. 잡다한 가재도구가 진열된 가게여서 눈요기로 족했지만, 개업 집이라 인사치레는 해야 했다. 고르고 골라 집어 든 게 찻주전자였다.

스테인리스 주전자. 손잡이는 흰 바탕 도기로 파란 나비 떼가 날아다니고, 뚜껑에 붙은 대추만한 손잡이 역시 도기로 감싸졌다. 몸통 한가운데 볼록볼록한 꽃다발이 양각으로 새겨진 게 돋보였다. 바닥 지름이 15센티 정도라 누가 보아도 차 마실 때 요긴할 것으로 보였다. 귀티나고 쬐깐한 게 한눈에 들어왔다. 막 쓰는 양은 주전자와는 사뭇 달랐다. 주방에 두면 혼자 튀어서 다른 주방용품들과 겉돌 정도였다. 작업복 차림 사람들 사이에 혼자 정장 입고 화장한 아가씨 같달까. 나의 찻주전자, 첫인상은 그랬다.


신접살림으로 들였던 배불뚝이 주전자는 옥수수나 보리차 물을 끓일 때 안성맞춤이다. 여분의 주전자를 사기엔 사치스레 보여 딸막딸막 하던 참이었다. 평소 같으면 어림없는 지출인데 이럴 때 질러버리면 명분이 뚜렷해진다. 식구들 것은 별로 재지 않는데 내 것 살 때는 열 번도 더 들었다 놨다 한다. 간만에 자신을 위한답시고 꼬불쳐 둔 지폐를 펼쳤다.


찻주전자는 가끔 닦기만 해도 광이 살아났다. 문지르는 만큼 윤을 내어주는 게 재미나서 찻주전자 닦는 데 공을 더 들인다. 냄비들 입장에선 주인의 편애를 시샘했으리라. 이리 쉴새 없이 닦아주었으면 요술램프 속 지니쯤은 나와줘야 맞지 않을까.


찻주전자는 불 위에 오르면 지르르 시동부터 건다. 끓으면 종지 그릇보다 작은 뚜껑이 벌렁벌렁 방정을 떨고 주둥이에 붙은 새끼손톱만한 덮개까지 들썩이며 야단도 아니다. 손잡이에 앉은 나비들은 뜨거워서 날개를 파닥댄다. 행주로 손잡이를 감싸 불판에서 구해내야 나비들은 잠잠해진다. 한껏 달궈진 주전자를 식구들이 어줍게 건드리다가 화들짝 놀라는 때가 있다. 우리 집 개는 순해요, 이런 말이 제 주인에게만 통하듯 우리 둘만 쿵짝이 맞았다.


이십 년 지기면 제법 자랑할 만한 연수이다. 식구들은 쓸 만큼 썼다고 버리자며 꼬드기지만 찻주전자를 안고나서는 까닭은 따로 있다. 한낱 주전자가 더는 아니어서다. 물건에서 친구로 도타운 사이가 된 지 제법 되었다. 유행가처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함께였다. 온기를 얻고자 한잔, 빗소리를 들으며 한잔, 흐린 날 몸이 노작지근하면 찻물을 많이 끓여 거푸 들이켠다. 오롯이 곁을 지켜주는 친구는 찻주전자이니 진정한 나의 반려物이다. 세월이 흘러 중년이 된 나는 체중조절을 하여도 뱃살은 푼푼한데 이 친구는 여전히 몸피가 그대로다. 자기 관리에 철저하다 해야 할까.


찻주전자를 들였을 때, 나는 커피믹스에 빠져있었다. 식후담배 한 모금이 간절한 애연가처럼 상을 물리고 마시는 커피 한잔이 그리 좋았다. 맛있는 커피를 위해서 애피타이저로 밥 먹을 정도였으니 말해 뭐할까. 손님과 마주 앉을 때, 찻주전자는 중개자처럼 가운데 착석한다. 내밀한 용건을 꺼내기 전, 차로 목을 축이면 속이 노글노글해져 입 떼기가 쉬워진다며 부추기는듯하다. 두 손으로 감싸 쥔 찻잔에 품고 있는 말들이 얼비친다. 얘기를 귀담아들어야 할 나도 자리를 고쳐앉아 한 모금 홀짝이면 절로 숙부드러워져 귀가 반짝 열린다. 뜨거운 옹달샘 물을 나눠마셨으니 두 마음이 하나로 모일 수밖에.


찻주전자의 생김새는 첫날처럼 본디대로지만 광택이 예전 같지 않아 안스럽다. 아무리 힘을 줘 닦아도 반흔 같은 얼룩은 퍼져만 간다. 더께가 눌러앉을 새 없이 닦지만 역부족이다. 세월도 어쩌지 못하는 지점에 도래했다. 물리적인 힘으로 해결되지 않으니 볼 때마다 눈에 밟힌다. 탄력 잃은 노인들 얼굴에 드리운 검버섯을 닮았다면 벗에게 실례되는 말일까.


주전자에 수명이 있다면 이 친구는 백수를 누렸겠다. 코팅이 벗겨진 프라이팬이나 금 간 사기그릇은 그날로 갈무리된다. 찻주전자는 아직도 물 끓이는데 손색 없고 손잡이도 짱짱하다. 거뭇거뭇한 얼룩이 보일 뿐인 것을 내칠 까닭이라곤 도무지 없다.


모건 프리먼이나 토미 리 존스 같은 외국 배우는 흉하다 싶게 패인 주름이나 우둘투둘한 피부를 화면으로 보여준다. 분장으로 가릴 만도 한데 여과 없이 드러낸다. 또 다른 노배우는 자기 주름을 가까이 찍으라고 주문한다고 한다. 삶의 흔적이고 치열하게 살아온 증표라며 노익장을 과시한다. 아름다운 뽐내기는 절로 존경심을 자아내게 한다.


며칠 전, 요리조리 살펴보니 뚜껑 도기 부분에 실금이 보인다. 자세히 보아야 알겠지만 실금은 불순물이 끼면 사금파리가 되고도 남겠다. 산산조각 나서 더는 일을 못 해 어리바리해지면 불 위에 오르는 일은 그만둬야겠지.


찻주전자는 물 끓이는 일이 처음 맡은 일이고 마지막 임무이다. 누군가에게 한때 뜨거운 존재였던 안도현의 연탄재 못지않게 찻주전자도 열정만 따져봐선 둘째기에도 서럽다. 한 십 년만 더 내 속을 데워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마지막 불꽃을 피워보라고 오늘도 세신사가 되어 살뜰히 벗의 몸을 닦아준다.



에세이문학 2021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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