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1년 있을 때 좋았던 점 중하나는 가족과의 관계이었다.
한국에 있으면 아무래도 가족관계에 문제가 생긴다. 결혼한 지 18년이 지났지만, 서로 얽혀있는 가족관계는 아직도 어렵다.
미국에 있을 때는 모든 일에서 제외되었다. 가족행사말이다.
"얘네는 멀리 있으니까..."
어찌나 이 말이 좋던지. 마음이 편하던지. 누군가는 알지 모르겠다.
가끔은 내가 악마 같은 마음이 생겨서 그러는 건가 자책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것조차도 하지 않으면 나는 마음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우리 시어머니는 나한테 티 안 나는 시집살이를 시키셨다.
본인에 받은 시집살이에 비할바냐라고 생각하실 것이 뻔하지만 나에게 다가온 은밀한 시집살이.
앞서 말했지만 나는 24살에 결혼했다. 매우 일찍. 어머님은 내가 결혼을 일찍 했다고 생각하지 않으신다. 이따금씩 "어머님 저 결혼 너무 빨리한 것 같아요"라고 말하면 "빨리해서 지금 자리 잡고 사는 거다"라고 하신다. 말이라도 "그래 누구야 맞아, 요즘시대에 너 너무 빨리했어. 아깝게. 빨리해서 아이 낳고 사느라 너무 수고 많았다. 예쁘다"라고 말해주면 얼마나 좋아?
이 대답 아니며, 본인 딸을 가리키면서 "너도 빨리 하지 않았어?" 하신다.
"어머님.. 어머님 딸은 저보다 조금 더 늦게 하기도 하였지만, 속도위반으로 한 거잖아요!"라고 꼬치꼬치 말하고 싶어도 한 번을 그렇게 못하였다.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사실이 아닌 것도 아닌데 그렇게 퉁명스럽게 이야기하신다.
아이 낳고는 하루가 멀다 하고 연락도 안 하고 집에 찾아오셨다. 어린 엄마가 갓난아이 쩔쩔매며 돌보다, 아이가 잠들어 이제 조금 쉴라 하면 찾아오셔서, 이말 저말 하시고 가셨다. 요즘은 뭐 해 먹고 사냐고, 가스레인지 위에 기름은 그때그때 닦으라고, 냉장고 문도 열어보시고, 장롱도 열어보시고, 친구랑 맛있는 것 먹었는데 남았다고 피자 두 조각, 과일 한팩, 남은 음식들 조금 싸 오면 내 마음을 그렇게도 괴롭히셨다.
가시고 나면 한참을 화장실에서 울었다.
2살 터울 아이들 회사 다니면서 돌보느라 나는 무척 이도 자주 아팠다. 몸살도 자주 나고 입원을 하는 일까지도 있었다.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과일 한팩, 너무 많이 사서 남았다며 남은 음식 싸 오셔서 이래저래 남처럼 이야기하고 가셨다. 어쩌다 한번 아이들을 맡길 때라면 몇 번씩 전화를 거셔서 아이들을 언제 데리러 올 것이냐며 언성을 높이셨다.
그런 날에는 죄인처럼 아이들을 찾으러 가면 나를 보며 한숨 쉬시면서 "내가 죽어야지 끝나지"라고 말하셨다.
내 평생에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보았다. 아마 앞으로도 누군가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본인이 우선이셨다. 항상 본인 스케줄과, 몸상태가 우선이 되시는 분이셨다. 나는 워킹맘이었기 때문에 아이들을 맡기거나 하는 일들은 빈번하게 일어났고, 친정엄마한테 부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1년을 내리 밤낮없이 돌보던 우리 엄마는 큰 병이 났다.
큰 병이 나서 엄마 걱정도 한 보따리, 아이들 맡길 곳 없었던 나는 어머님께 어린이집 알아보는 1달 간만 아이를 부탁했었다.
17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거실에 앉아 울먹울먹 거리며 "어머님 이래저래 해서 한 달 간만 봐주시면 어린이집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돌아오는 대답은"안된다"였다. "어렵다"였다.
그래 객관적으로 보면 봐줄 수도 안 봐줄 수도 있다. 그럴 수 있다. 아들 며느리가 어려움에 처하였을 때 도와주지 않을 수 있다. 그럴 수 있다. 그렇게 마음을 다독였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복직한 지 1년도 안되어 눈치 보며 다시 휴직에 들어갔고, 이듬해 둘째가 생겼다.
그런데, 그때 한 가지는 생각했었다.
"어머니, 아버님도 나 아플 때, 힘들 때 안 도와주셨으니, 나도 그렇게 할 거라고"
"무 자르듯이 나도 자를 거라고"
"뭐든 안된다고 할 거라고"
나쁜 마음이라고 이따금씩 생각을 했다. 그런데 살기 위해서 그렇게 되뇌었다.
만삭의 임신한 며느리를 데려다가 맛있는 거 사준다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데려간 집은 점심특선으로 매우 저렴하게 파는 낙지볶음집. 메뉴도 하나, 가격도 저렴해서 인지 한여름 뙤약빛에 30분을 줄을 서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 그날 나는 매우 낙지볶음 먹고 하루종이 설사를 했다.
본인이 좋아하는 것을 드신 것이라 생각했다. 서운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나도 그렇게 해야지 했다.
본인 받은 시집살이를 현대판으로 나에게 얄궂게 구는 것인가 생각을 했다.
수도 없는 일들이 내 마음속에 파고들었지만, 나도 그렇게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그래도 다행히 옆에서 잘 챙겨주는 남편덕에 이래저래 참고 살았다.
작년부터 아버님, 어머님 모두 건강이 좋지 않으시다. 자식들을 볼 때마다, 나를 볼 때마다 "다른 집의 자식들은 부모가 아프면......" 계속 말하신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고 서운한 것도 조금 잊히는 듯했다. "나는 받은 것이 없으니, 당당하고 좋아!"라고 말하며 내 마음을 위안 삼고 했다.
그런데 요즘 이래저래 몸이 좋지 않으신 아버님, 어머님은 자꾸 불만을 토로하신다.
많은 생각이 든다. 그리고 자꾸 예전이 떠올라 마음이 괴롭다.
아프셔서 소고기다, 삼계탕이다 과일이다 뭐다 챙겨가면, 싫어하는 음식에는 난색을 표하신다.
"어머님! 어머님은 저 제대로 된 과일 한번 사주신적 없으시거든요~!"라고 수백 번 말하고 싶다.
십수 년 전 아빠가 돌아가셔서 아이들을 3일 봐주셨던 적이 있다. 장례를 마치고 집에 오자마자 전화를 주셨다.
"아이들 때문에 힘들다고 데려가라고..."
장례일주일이 지난 뒤 또 전화를 주셨다.
"너는 아버님 생신이 다가오는데 전화도 없다고"
아빠상으로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닦달하셨다.
그때 나는 또 생각했다.
"나도, 아버님 어머님 힘들 때 이렇게 위로를 해드려야겠구나"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아빠 돌아가시고 2주 만에 아버님 생신파티에 참여해서 생신축하노래를 불러드렸다.
어머님왈 건강이 최고예요 아가씨왈 아빠가 건강하셔서 다행이에요
아직도 그분들의 대화가 또렷이 기억난다. 배려 없는 아우성을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남편도 밉다. 똑 부러지게 바른말 한마디만 해주었더라도, 이렇게 응어리가 되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아들에게 조용히 전화를 걸어
"누구야는 좀 어떠니, 이번 아버지 생신을 그냥 조용히 넘어가자 지금 생신 챙길 여유가 어디 있겠지, 너 말도 꺼내지 마라. 옆에서 아내 잘 챙겨주고, 얼마나 상심이 크겠니? 누구야 좋아하는 음식이라도 조금 해줄까?"
라고 말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면 나도 "아버님, 어머님 아가씨 힘들 때 도움이 될게요"라고 마음이 들었을 텐데...
이렇게 크고 작은 일들로 나는 항상 마음이 어려웠다. 어머님은 항상 불만이 많으셨고, 본인 위주였다. 아버님은 화를 무척 내셨고, 본인 위주였다. 시댁에 모든 식구들이 앉으면 본인 이야기 하느라 바빴다.
나도 들어주느라 귀가 바빴다.
20년이 다되어 가지만, 내가 아직도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 관심도 없으시다. 나에 대한 유일한 관심사는 회사를 그만두었는지 다니는지 그 정도이다. 가끔 몸이 어떠냐고 물어보시지만, 비타민 한 조각 얻어먹어본 적 없다. 아프다고 죽 한번, 아이 낳았다고 미역국 한 번 얻어먹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이러기도 참 쉽지 않겠다 싶다.
나도 아들을 키운다. 이제 내년이면 고등학생이다. 귀하다 예쁘고 항상 사랑스럽다. 이 아들이 누군가를 만나 한 가정을 이루었다고 상상을 해본다.
나는 어떤 시어머니가 되겠는가?
다른 건 모르겠고,
적어도 내 입만 신경 쓰는 어른은 되고 싶지 않다.
미국에 유명한 체인점인 파네라브레드의 경영철약이 베풂을 받고 싶으면 베풀어라 이다.
자신이 어려울 때 손 내밀고 싶으면, 적어도 그 사람 어려울 때 손이라도 잡아줬어야지!
그 사람 눈물이라도 닦을 휴지는 건넸어야지!
나는 요즘 많은 자아가 싸운다. 부모 아프다고, 휴가 내가면 쫓아다니는 남편을 보니 나쁜 심보가 올라온다.
이렇게라도 말해줘 남편~!
"누구야, 내가 챙겨드리는 것이 너는 마음이 안 좋을 수도 있겠다. 그래도 나는 자식이니까 부모를 돕고 싶어"라고
나도 안다. 자식과 며느리는 한마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어떻게 내속으로 낳은 자식과 다 큰 자식과 결혼하여 맺어진 며느리의 마음이 같겠냐만은... 그래도 좀 알았으면 좋겠다.
매우 불편한 마음이라는 것을 말이다.
나도 반복학습이 되여서 행여나 그런 시어머니가 될까 봐 두려울 뿐이다. 그래서 글을 쓴다. 계속다짐하는 훈련을 한다.
어렵고 힘든 일 있을 때는 상대방부터 살펴야지. 너를 내려놓고!
미국에 있는 1년 동안 생각하지 않았던 복잡 미묘한 마음이 한국에 들어오니 꾸물꾸물 올라온다. 매우 기분 나쁘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