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나는 4번의 유배를 당했다(1)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
유배라 함은 과거 역사에서 죄인을 멀리 귀양 보내는 일종의 형벌이다. 주로 당시 사화 등 정치적인 이유로, 사형이나 일시적 형벌 대신에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일체의 정치활동을 못하게 할 목적으로 쓰였을 것이다. 죄의 무게에 따라 유배지가 달랐다고 한다. 무거운 죄일수록 한양에서 최대한 멀리, 2천리, 2천 5백리, 3천리 밖으로...
그래서 유배지로 이름난 곳이 여럿 있다. 함경도 최북단 삼수 갑산(이 글을 쓰면서 삼수 갑산이 이런 의미라는 걸 처음 알았다. ‘삼수 갑산을 가더라도’는 ‘최악의 경우가 되더라도, 또는 아무리 힘들어도’라는 뜻으로 쓰인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가셔서 그 유명한 세한도를 완성한 제주도, 우암 송시열 선생이 계셨던 포항 장지, 정약전 선생의 자산어보가 완성된 흑산도, 기타 완도, 보길도, 추자도, 가덕도, 남해도 등 우리나라 최남단의 섬들, 그리고 그 길목인 전남 강진 등이 유배지로 유명한 곳이다.
유배하면 정약용 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 기록에 의하면, 정약용 선생은 1801년 신유박해로 전라남도 신안 앞바다의 영산도라는 섬에 18년간 유배당하신다. 거기서 유명한 명저 ‘목민심서’ ‘흠흠심서’를 저술하셨다.(아마도 유배가 아니었으면, 바쁘셔서 책이 나오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보통 유배 가면 자급자족이 원칙이었으나, 영화 ‘자산어보’에서 보는 것처럼, 워낙 지체와 학식이 높은 양반 어르신이라 동네 사람들이 성심성의껏 도와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깥출입은 엄격히 금해졌지만, 대부분 산간 오지거나 섬이었기 때문에 어디 마땅히 가실 곳도 없었으리라. 벼슬을 못해서 그렇지 살 만은 했을 것으로 보인다.
갑자기 왠 유배 타령인가? 일종의 미끼다.
내가 공직생활 하면서 좀 유별난 게 있다면, 다른 일반 공직자들과 달리 유배 비슷한 것을 여러 번 겪었다는 점이다. 정확히 4번이다.
사실 내가 뭐 정치범도 아닌데다, 조선시대처럼 어디 멀리 저 지방으로 쫓겨나는 것도 아니고, 기껏 서울시 안에서 빙빙 돈 거라서 유배라고 하기에는 격이 안 맞다. 더구나 내가 무슨 책 나부랭이 같은 거라도 써서 기록으로 남긴 것도 아니기에.... 과장이다. 엄밀히 이야기하면 내 뜻과는 전혀 무관한 예기치 않은 좌천발령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좌천성 발령도 공직사회에서는 흔치 않은 경험이라서 현대판 유배라 칭하고 이야기를 풀어 본다.(이 글을 ‘유배 저서’라고 볼 수 있을까?)
내가 이 책 서문에서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나는 ‘97년에 공무원으로 입직하여, ’98년 4월에 첫 보직으로 강북구청 민방위재난관리과장으로 보직 받았다.(당시는 모두 시·군·구 등 지방자치단체로 발령이 나는 게 원칙이었다.) 얼마 안 있어 큰 수해가 났었는데, 나는 자발적으로 반팔 반바지 차림으로 공익근무요원들과 함께 수해복구 현장을 누비고 다녔다. 그 덕분인지, 나는 구청장님으로부터 격한(?) 인정을 받아, 6개월 만에 일약 생활복지국 주무과장인 사회복지과장으로 발령받았다.
내가 사회복지과장일 때 우리 팀장님이셨던 여성 팀장님이 있었다. 그분이 그 뒤로 감사팀장(서울시 자치구 역사상 최초 여성 감사팀장으로 언론에도 남)으로 가셨고, 이분과 관련한 각종 루머들이 돌기 시작했다. 구청내의 인사가 이분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내가 일일이 그것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바로 그때 나와 의형제를 맺은 구청장 비서실장 형님이 갑자기 발령이 나서 우리과 팀장으로 오셨다. 그 여성 팀장님과 무슨 일이 있었는데, 그 여파로 우리 과로 소위 좌천발령 되어서 오셨다는 것이다.
나는 ‘이거 문제가 심각하구나’ 생각하고 당시 부구청장님과 몇몇 국장님들과 그 여성 팀장님이 계속 이렇게 하게 두면 안 되지 않느냐며 뭔가 해결책이 있어야 함을 건의했다. 하지만 그 대선배들께서 하시는 말씀은 “청장님께서 그렇게 총애하는데.... 우리도 알지만 어쩔 수 없지,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겠는가?”라고 하셨다.
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혼자서 답답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청장님께 인정을 받았는지, 2년간의 사회복지과장직을 마치고, 구청 과장중 넘버 4라고 할 수 있는 문화공보과장으로 발령이 났다. 2001년 1월 일이다.
분에 넘치게 인정을 받았다는 게 화근이었다. 모든 일에 자신이 있었고, 3년차 밖에 되지 않은 사실은 초짜 과장이 ‘지가 뭐 구청에서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고, 문제를 풀어갈 적임자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자신감이 넘치면 교만해지는 법, 꼭 이럴 때 사달이 난다.
난 청장님이 나를 진짜로 믿고 계시니깐, 내가 청장님께 진심을 다해서 말씀드리면 청장님도 그 뜻을 받아주시리라 믿었다. 그리고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러 간다. 문화공보과장으로 발령난 바로 다음날, 난 한 장짜리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보고서를 들고 청장님실에 간다. 그리고 독대하여 약 30분에 걸쳐 내가 아는 그 팀장님과 관련된 이야기와 우리 조직이 서서히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말씀을 진심을 다해 드린다. 청장님께서는 조용히 듣고만 계시다가 “알았어, 나가봐” 하셨다. 나는 ‘큰 일을 했다, 이제 말씀드렸으니 됐다’라는 생각으로, 밖으로 나와서 담배 한 대를 피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여기서부터 사달의 결말이 시작된다. 내가 사무실에 들어가자 마자 그 팀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온다. “과장님 왜 절 싫어하십니까?” 이 말을 필두로 바로 다음부터 나는 청장님으로부터 나쁜 놈이다 소리를 직·간접적으로 듣는다. 부구청장님께서 나를 찾아 “강과장, 너 왜 갑자기 청장님께서 너를 뭐라 하신다. 무슨 일 있냐?” 라고 하시기에 “제가 며칠 전 청장님께 그 팀장 얘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래서 그러시는구나. 알았다”하시기도 했다.
난 그 후로 정말 약 4개월간 상당한 박해(?)를 받았다. 심지어 구청의 6급 팀장 이상급 전체가 참여하는 정례회의에서 내 바로 다음인 후임 사회복지과장님 보고를 들으시고 청장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래, 사회복지과장은 이렇게 일을 해야지. 전임 과장은 강북 사회복지를 다 말아먹었어”라고 하시지 않는가? 순간 귀를 의심했지만,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렇게 “우리 강과장, 강과장처럼 해야지”라고 하시던 분이....
나는 ‘이대로는 어렵겠다’라고 생각하고, ‘서울시로 가야겠다’라고 마음먹었다. 내가 마음을 먹은 게 들켰는지, 4월 초에 부구청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너 조만간 시로 가게 될 거니, 아무 소리 말고 조용히 가라. 언제가 될지는 나도 모른다.”라고 하셨다. 바로 그날 집에 들어가니, 아내가 “여보 시 인사과에서 전화왔는데, 4월6일 아침 10시까지 정장 차림으로 시로 들어오랍니다.” 본래 구청과 시청은 1대1 교류를 원칙으로 한다. 헌데 나만 보내고 시에서 받지를 않았으니 방출인 것이다. 얼마나 급하고 보기 싫었을까?
여기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비록 청장님과는 그렇더라도 다른 국장님들이나 과장님들과는 아주 사이좋게 지냈었다. 그런데 발령 바로 전날이 식목일이라, 전 간부들이 식목행사에 참석해서 뒤풀이를 가졌을 때도 나에게 아무 말이 없었고, 심지어 4월 6일 당일 아침에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청장님실에서 하는 주요 간부 T타임 때도 아무 말이 없어 나는 조용히 빠져나와 시로 가서 발령장을 받고 왔다. ‘아 세상이 이런 거구나. 좋을 때와 좋지 못할 때 사람들의 태도는 이렇게 180도 달라지는구나’를 느꼈다고나 할까!
꼭 청장님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강과장, 그리 되었네. 아쉽지만 이제 떠날 때가 되었네.”라고 말이라도 해줬으면 조금은 덜 서운할텐데....(괜시리 나만의 미련인가? 연민인가?) 나는 어찌 되었건 서울시라는 내가 처음부터 목표로 했던 큰물에 가게 되었으니, 인간사 새옹지마다.
내 유배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더니 나는 애초에 글렀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