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뒤로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 기자도 그 시의원도 더 이상 괴롭히지도 나타나지도 않았다.
우리는 1차로 선정된 5개 학교법인을 대상으로, 실제 교육현장에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현지실사 계획을 수립하였다. 영국과 미국 그리고 한국 법인이었기 때문에, 장기간의 해외출장이 필요하였다. 그 분야 전문가, 교수님, 시의원님을 포함하여 현지 실사 대표단을 5~6명으로 꾸렸다. 정말 바쁘신 그분들을 모시고 가야하는 것이었기에 매우 어렵게 어렵게 일정을 잡았다. 영국을 거쳐 미국 갔다가 돌아오는 순서로, 대략 10박이 넘는 일정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물론 현지 법인에게도 우리 실사단이 간다고 연락을 마친 상황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한 번 전혀 생각지도 않은 돌발변수가 발생한다. 정말 말도 안 되는....
현지실사 출장계획을 실장님까지 결재받고, 마지막으로 1부시장님께 상신 해놓은 상태에서 결재가 나기를 기다렸다. 출장이 바로 이틀 후였다. 그런데 갑자기 1부시장님께서 보류 결재를 하셨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설명도 없이....
사실 당시는 전체적인 상황이 살짝 바뀐 상태였다. 외국인 국제학교 사업은 오세훈 시장님의 역점 사업이었는데. 진행 중간에 오세훈 시장님께서 무상급식 관련 주민투표 문제로 사퇴하시고, 곧바로 보궐선거로 박원순 시장님께서 취임하신 뒤였다. 아무리 그래도 오랫동안 치밀하게 준비하고 진행해오던 사업이고, 막바지 절차만 남았는데 느닷없이 출장을 보류한다는 1부시장님의 지시는 정말 어이가 없었다. 실장님께서도 “부시장님의 뜻이니 어쩔 수 없다”고만 하셨다.
당연히 어렵게 시간을 빼고 일정을 준비하신 실사단 심사위원들께서 심히 격노했다. 시의원님도 말이 안 된다며 집행부에 항의하시고, 특히 심사위원장 교수님은 심각하게 항의서한을 집행부에 보내셨다. 허나 어쩌랴! 이미 그리 결정되어 버린 것을.... 그래서 일단은 보류된 채로 기차는 멈춰서서 다음 결정을 기다려야만 했다.
곧이어 서울시의회 행정사무감사가 시작되었다. 우리 부서가 속한 경제진흥실은 시의회 기획경제위원회 소관이었는데, 느닷없이 기경위 위원장님을 비롯한 위원 몇 분이 아주 강하게 외국인 국제학교 사업을 반대하고 나섰다. 사업을 시작할 때 분명히 시의회에도 보고하여 이미 다 승인을 받아놓은 사업이었음에도, 갑자기 시의원 몇 분이 태도를 확 바꾼 것이었다.
이것도 사정인즉슨 이렇다. 처음부터 말썽이었던 그 기자가 그 사이에 이 사업 자체를 폐기하도록 시의회에 로비 같은 것을 하였던 것이다. 기경위 위원 몇 분을 모시고 그 학교법인에서 간담회를 했다는 것이다. 이 사업은 굳이 필요 없다고, 현재 국제학교로도 충분하다고.... 한 마디로 ‘어짜피 내가 못 먹는 감, 남들도 못 먹게 하자’는 심산인 셈이다. 이 사업이 그대로 진행된다 해도 자기들 법인에게 운영권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에서, 사업을 무산시키는게 오히려 낫겠다는 판단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위원장님을 비롯한 네 분의 위원님들이 강력하게 이 사업이 필요 없음을 주장하고, 우리에게 포기를 강요하였다. 왜 필요하냐고, 더구나 심사과정에서 과장이 매우 편협하게 심사를 진행했다는데.... 당연히 그 네 분 중에는 심사과정에서 포기하고 가신 시의원님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네 분 중 나와 친분이 있는 한 시의원님은 나에게 살짝 오셔서 “강과장님, 그만하시죠. 그러다 다칠 수도 있어요”라고 충고 겸 언질을 주기도 했다.
나는 두 가지 방법으로 저항을 시도했다. 한 가지는 당시 새로 들어오신 정무부시장님께 부탁드렸다. 이 사업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미래에도 꼭 필요하니 진행될 수 있게 정무적으로 도와주십사 하고.... 부시장님은 “시의회와 잘 상의해 보세요”라는 답만 주셨다.
다른 한 가지는 최후의 저항이다. 시의회 상임위에서 반대하는 시의원들을 논리적으로 설득하여 이기는 것이다. 하지만 논리로는 설명이 되지 않았고, 설득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이미 확고하였다. 나는 결심하고 발언대에 섰다. 그리고 준비한 최후 진술 같은 것을 토해냈다. 기억이 또렷하지는 않지만, 대개 이런 내용이었다. “이 사업은 제가 서기관으로 승진하고 처음으로 맡은 사업으로서, 최선을 다해 준비해 왔고, 제 상식과 양심을 걸고 말씀 드리건데, 현재의 국제학교 상황이 서울의 국제적 위상에 걸맞지 않게 소규모이고 부족한 점이 많으니, 지금부터 준비해야 하는 꼭 필요한 사업이며, 갑자기 시의원님들께서 반대하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다시 진행할 수 있게 잘 살펴봐 주십시오”(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서울시 다수 직원들이 이 장면을 생중계로 보고서 기립박수를 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저렇게 시의원들에게 대놓고 대들 수 있는 간부도 있다는 것에 놀라서....)
사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의 정치적 상황에서 그 국제학교 사업이 어떤 맥락에서 그렇게 좌초되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런 이야기를 누구도 나에게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치는 생물과 같다고 했으니, 정말 그 학교의 ‘못 먹는 감 로비’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정무적으로 보다 큰 차원에서 결정된 것인지? 나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지 담당 과장으로서 그렇게 갑자기 미래를 위한 대규모 사업이 거꾸러진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무튼 이런 과정을 거쳐서 최후로 국제학교 사업은 끝났다. 시의회 권유로 우리 집행부가 이 사업을 포기하기로 선언한 것이다. 너무나도 허탈했다. 나 뿐만이 아니라, 나와 같이 이 사업을 진력을 다해서 준비했고, 수많은 외부의 공격을 방어했던 팀장님 그리고 여러 주임님들 모두가 땅을 쳤다. 우리는 서로를 위로했다. 수고 많았다고, 어쩔 수 없다고, 잊어 버리자고....
그 뒤로 평안한 날들이 지나갔다. 그리고 며칠 뒤 나는 돌연 몸에서 에너지가 몽땅 빠져나갔음을 느끼고, 다리에 힘이 없어서 출근을 할 수가 없었다. 병원에 갔다.
동네 내과 의사 선생님은 바로 알아보고, 혈당기로 체크했는데, 삐삐 소리가 나면서 ‘측정 불가’가 나왔다. 의사 선생님은 급성 당뇨라며, 일단 급한 대로 치료해 줄테니 빨리 큰 병원으로 가서 치료받으라고 했다.
서울대 병원 응급실로 가서 진료받았다. 혈액 검사 결과 혈당 수치가 900이 넘게 나왔고, 담당 의사선생님은 당뇨환자 진료 몇십 년 만에 이런 높은 수치는 처음 봤고, 더구나 그런 수치로 쇼크상태가 아니라 이렇게 멀쩡하게(사실 비틀대면서 들어갔지만....) 걸어 들어온 환자는 처음이란다.(놀라우시죠? 제가 여러 가지로 기록을 좀 갖고 있습니다)
나는 일주일간 입원 치료를 빡쎄게 받고 퇴원했다. 스트레스로 인한 급성 당뇨병과 고혈압으로 위험하니, 정말 무리하지 말고 절대 스트레스 받지 말고 일하라는 의사 선생님의 진심 어린 충고와 함께....
나는 그 뒤로 웬만한 일에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려고 무진 노력한다. ‘뭐 다 그럴 수 있지’라는 생각으로.... 내 성격에 쉽지는 않다. 그래서 12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당뇨병과 고혈압을 지병으로 안고 산다. 그래도 가급적 스트레스 받지 않으려고 최대한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가려 한다. 주중에는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과 술 한잔에 재미난 세상 이야기로, 주말엔 즐거운 테니스로 땀을 흠뻑 흘리며 세상사를 잊는다. 그게 최고다.
지난(至難)한 이야기가 끝이 났다. 일단 이 사연의 중간중간에 나오는 주인공분들의 양해를 바랍니다. 이 일이 나에게 억울한 일도 아니고, 국제학교가 생기지 않았다고 해서 서울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다. 헌데 다 지난 옛이야기를 이렇게 길고 자세하게 되뇌이는 것은, 내가 잘났다거나 지금에 와서 누구를 비난하거나 그런 목적이 절대 아니다.
다 지났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이다.
우리 행정을 둘러싼 무수히 많은 주변 환경이 있고, 각 사안마다 갈등 또한 있을 수 있다. 가장 현명한 것이 무엇인지 사실 잘 알 수 없으며, 실제로 어떤 일은 당시에는 좋다고 했는데 지나고 보면 결국 좋지 않은 결과를 낼 수도 있다. 허나 내가 생각하는 중요한 것은, 행정은 당연히 주변의 영향을 받고 적절하게 그것을 존중해야 하지만, 내가 서술한 위의 상황에서처럼 행정이 그리고 그 안의 우리 공무원들이 누군가 힘이 있고 영향력 있는 그 어떤 세력들에게 휘둘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외부의 강한 세력들이 자기들의 입장이나 이익을 위해 행정을 조정하려 할 때, 잘못하면 내·외부로 상처투성이가 될 수도 있는데 제대로 방어막도 없는 상황이라면, 과연 우리들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 어렵다. 사실 나에게 다시 이런 상황이 온다면, 지금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지금은 자신이 없다. 세상을 나도 많이 살았으니까.... 다치면 나만 손해라는 것 정도는 알 나이가 되었으니까....
지금처럼 예전보다 훨씬 더 투명하고 모든 일이 공개되는 상황에서는, 내가 겪은 과거와 같은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 허나 그 크기나 깊이의 정도만 다를 뿐, 우리 행정을 둘러싸고 영향을 미치려는 많은 외부 세력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최대한 우리가 올바름과 형평을 잃지 않으면서, 다수를 만족시키는 방법은 무엇인지 고민해볼 일이다. 실력과 유연함을 키우는 것이 기본이 되리라 본다.
갈대는 흔들리지만, 결코 꺾이지 않는다. 존버가 답이다.
p.s. 이 글을 쓰면서 생각건대, 결국 내 고집 때문에 이 사업은 무산되었다. 아쉬운 일이다. 내가 좀 더 현명하게 대처했다면, 사업이 무산되지는 않았으리라. 나에게 다시 이런 일이 생긴다면, 나는 좀 더 능글맞고 유연하게 대처해 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