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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우 Aug 05. 2023

[순우여행노트 25] 사이공 해방기념일(2)

베트남 인상

  1954년 제네바협정과 함께 프랑스군이 인도차이나반도로부터 철수한 이후 줄곧 북베트남 월맹과 남베트남 월남과는 이념의 갈등과 서로의 방식으로 통일을 이루기 위한 투쟁이 전개되었다. 이와 같은 남북의 대립은 상호 무력 충돌로 이어졌으며 1975년 사이공이 월맹의 집요한 공세에 의하여 무너지기까지 20년에 걸친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 베트남전쟁이 지속되었다. 1964년 미군의 개입으로 확전이 이루어진 베트남전쟁은 1972년 미국과 공산 베트남 간에 체결된 파리협정에 따라 미군이 철수하면서 남베트남군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드디어 1975년 4월에는 사이공의 함락과 함께 월남이 무너지고 공산주의 월맹에 의해 하나의 나라로 통일되기에 이르렀다.


  베트남 통일 후 하노이의 공산정권은 철저히 사회주의적인 정책을 펼치며 극히 폐쇄적인 대외 정책을 펼쳐나갔다. 오랜 베트남전쟁 동안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중국과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베트남은 인도차이나 지역의 정치적 역학관계가 변화되면서 그 관계가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친 서방 성향의 론 놀(Ron Nol)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베트남의 인접국 캄보디아의 폴 포트(Pol Pot)의 급진적인 공산정권이 중국과 급속도로 가까워지게 되었다. 캄보디아가 강력해지는 경우 중국 세력에 의해 그들이 포위될 수도 있다는 우려에서 위협을 느끼게 된 베트남은 그들을 경계하게 되었고 중국과의 관계는 급격히 멀어지게 되었다.


  중국 변방 국가의 하나로 항상 중국의 팽창주의를 경계해오고 있던 베트남은 인도차이나반도에서 이와 같은 새로운 국제정치적인 구도가 형성되자 곧 뿌리 깊은 중국에 대한 불신을 증폭시켰다. 이러한 상황의 변화에 따라 중소등거리외교노선(中蘇等距離外交路線)을 견지하고 있던 베트남은 중국과는 멀어지는 대신 친소노선(親蘇路線)으로 소련과의 관계를 급진전시켰다.     

베트남공산당 전당대회장 모습(자료: yna,co,kr)

  그런데 내가 베트남에 머무르던 1996, 1997년의 상황은 또다시 적지 않은 변화를 거치는 중이었다. 소련의 강력한 지원을 받고 있던 베트남은 중국이 문화혁명의 혼란기를 거치는 동안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폴 포트 정권을 무너뜨리고 친 베트남 성향의 헹 삼린(Heng Samrin) 정권을 수립하게 하였다. 그러나 1990년 소련연방의 붕괴 이후 러시아의 국력이 쇠진해진 데 반해 중국은 등소평(鄧小平)식의 개방주의 경제발전으로 국력이 커지게 되고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역내 국가 간의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자 베트남은 재빨리 중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게 되었다.

     

  한편 베트남을 도와줄 만한 여력이 없어진 러시아는 베트남과의 관계를 현실적으로 재조정하기에 이르렀다. 즉, 실질적인 협력이라기보다는 외교적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정도로 그 관계가 사실상 크게 퇴보되기에 이르렀다.     


  역사는 이렇게 짧은 시간에도 쉬지 않고 변해가고 있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하노이 북부지역에 베트남 최대의 수력발전소를 건설했던 소련의 기술진들이 체류했던 그들의 전용 아파트단지는 이루 썰렁하기가 말할 수 없다. 한때, 많은 사람의 발길로 활기를 띠었을 탄 순 박(Tanh Sun Bac)아파트 단지의 정원은 쥐 죽은 고요하고 사람들로 북적거렸을 사무실은 문이 닫혀진 지 무척이나 오래된 것처럼 보였다.


  이에 비해 중국과 베트남이 만나는 국경지대의 모습은 얼마나 큰 활기로 가득 차 있던가. 베트남 북부 국경지대의 랑손(Lang Son, 凉山)이라는 도시와 중국의 핑샹(Ping Xiang, 憑祥)이라는 도시 사이의 중간쯤의 국경지대에 있는 시장은 별다른 시설이 되어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중국과 베트남 간의 국경무역이 이루어지는 국제 무역지대라고 할 수 있다. 하루에 오가는 거래 금액이 100~300만 달러, 연간 공식적인 거래액만도 3억 달러가 넘는다고 했다.     

베트남 국기와 공산당기가 내걸린 거리 풍경(자료: 네이버 블로그)

 이렇듯 정치적 불안은 물론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러시아와의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실리적인 관계증진의 가능성이 큰 베트남과 중국과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음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또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기도 하고 변화무쌍하기도 한 베트남의 발자취를 보면 지금의 그들의 삶이 참으로 대단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의 국무장관으로 베트남전쟁을 이끌었던 사람 중의 하나인 맥 나마라(Mc Namara)는 그가 은퇴한 후 발간한 그의 회고록 『In Retrospect; The Tragedy and Lessons of Vietnam』에서 월남전쟁을 ‘실패한 전쟁(Lost War)’ 또는 ‘잊히어진 전쟁(War Forgotten)'이라고 말하면서 그 전쟁에 대한 솔직한 증언과 교훈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베트남전쟁에 발을 들여놓은 케네디(John F. Kennedy)행정부와 이 전쟁을 확전으로 이끈 존슨(Lindon B. Johnson)행정부 모두가 그 전쟁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즉, 그들이 획일적인 공산주의의 위협을 너무 과대평가한 반면에, 호찌민 투쟁의 민족적 측면을 과소평가한 나머지 미국국민들을 속이는 중대한 과오를 범했다는 것을 시인하고 있다.


  또 그는 베트남전으로부터 얻을 수 있었던 중요한 교훈 몇 가지를 아주 명쾌하게 이끌어냈다. 그 첫 번째는 어떤 분쟁이든 그 분쟁의 성격을 오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의 교훈은 이른바 민족주의(Nationalism)의 저력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또 앞으로의 많은 분쟁이 민족주의로 인해 빗어질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했다. 베트남전쟁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교훈의 하나는 유형적인 군사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을 과신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국의 안보가 직접적인 위협을 받는 상황이 아닌 경우라면 일방적으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즉, 미국의 월남전 개입은 미국의 안보가 크게 위협받는 상황이 아닌 상태에서 무모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북위 17도 선으로 분단되었던 베트남(자료: 네이버 블로그)

  베트남전쟁이 완전히 끝난 지 20년이 지난 시점에서 그가 회고하고 있는 것과 같이 그들은 민족의 자존과 자주라는 보다 숭고한 가치와 불굴의 정신력이라는 무형의 힘이 거대한 유형의 군사력보다 더 크고 중요하다는 것을 베트남의 역사를 통해서 깨달을 수 있다. 그렇다. 각각이 모두 고귀한 인간의 집합체인 민족의 자주와 자결, 그들의 신성한 생존권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귀중한 것이다. 이를 속박 당하거나 빼앗긴 자들은 이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베트남의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또, 자신의 생존과 자주를 위해 결연하게 일어서는 이들을 언제까지나 무력으로 와해시킬 수만은 없다는 사실도 확인시켜 준다.


  다만, 베트남의 역사에 있어서 한 가지의 의문을 제기한다면 다 같이 간절하고 애타게 염원했던 베트남의 통일이 남측의 자유민주주의자들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고 공산사회주의자들에 의해 달성될 수 있었느냐 하는 점일 것이다. 물론 그것은 당시의 정치․사회․군사 등의 제반 상황이 그런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 근년의 역사의 흐름을 보면 또 다른 귀중한 하나의 교훈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결국에 가서는 민주자유주의가 승리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들의 삶을 추구해 나가면서 택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제도가 자유민주주의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간 인류가 그간의 짧지만은 않은 역사를 만들어오면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는 과정에서 그나마 많은 사람이 신뢰할 수 있는 제도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 자유민주주의 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는 인간의 존엄과 생존, 자주와 창의를 중시하고 독단이나 전횡, 독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고 다수의 합리와 이성, 합법이라는 보편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이념과는 크게 다른 공산 사회주의 이념에 토대하여 투쟁을 전개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통일 베트남을 성취한 북측의 민족주의자들은 서서히 그들의 기본 이념과 가치를 새롭게 갱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노동 착취, 유물론적 역사관, 계급투쟁, 사유재산의 몰수, 공동생산 공동분배와 같은 공산 사회주의의 핵심 사상이 모두 무너져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도 자유와 민주라는 보편적인 가치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시대의 사람들이며 그것이 쉽게 버려질 수 있는 이념이 아니라는 것을 무수한 역경과 고난 끝에 깨닫게 된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인류의 역사는 민족의 자존과 자주, 그리고 민주와 자유라는 두 가지 모두의 귀중한 자산을 함께 누릴 수 있는 축복을 그렇게 쉽게 부여받을 수 없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베트남의 역사는 그러한 두 가지 모두의 축복을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누리게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 그런 축복의 특권이 포기하지 않는 자주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는 사람들, 위대한 민족에게 주어진다는 것도 보여주고 있다. (200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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