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방에서

빌려 지내며 가까워진 시간들

by 여담

여자친구와 연애할 때 우리는 장거리 연애를 했다. 그래서 여자친구를 보러 갈 때마다 항상 숙소를 잡아야 했다. 하루 이틀 머무는 일정이었고, 갈 때마다 숙소비가 들었다. 그게 당연한 줄 알았고, 어쩔 수 없는 비용이라고 생각했다. 숙소비와 교통비가 부담이 되기 시작할 때쯤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친구는 여자친구 직장에서 차로 15분 정도 떨어진 대학가 앞에서 자취를 하고 있는 친구였다. 처음부터 엄청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같이 어울리는 무리 중 한 명이었고, 따로 연락을 주고받는 정도도 아니었다. 그냥 친구였다.
어느 날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나왔고, 조심스럽게 자취방에서 하루 자도 되겠냐고 물었다. 숙소비도 아낄 겸, 친구 얼굴도 볼 겸이었다. 그 친구는 별일 아니라는 듯 흔쾌히 괜찮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여자친구를 만나러 갈 때마다 그 친구 자취방에 들러 잠을 자기 시작했다.

그게 몇 번 반복되다 보니 우리는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밤에 맥주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연애 이야기도 했고, 일 이야기, 사는 이야기들도 했다. 서로에게 특별한 조언을 해준 건 아니었다. 조금은 바보 같고 어디 가서 말하기 창피한 그런 얘기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시간들이 쌓이면서 우리는 생각보다 많이 가까워졌다.

나는 그 친구가 자취방을 옮길 때마다 같이 짐을 옮겨줬다. 본가에서 자취방까지, 다시 다른 자취방으로. 차에 짐을 가득 싣고 오르내리는 게 재밌었다. 그때는 그게 특별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친구와 나는 생일도 같았다. 친해진 이후로는 매년 생일이 되면 잠깐이라도 얼굴을 보려고 했다. 케이크를 챙기지 못해도, 짧게 인사만이라도 했다. 가끔은 연락도 없이 찾아갈 때도 있었다. 친구가 없을 때도 있었고, 혼자 자취방에 들어가 자고 나온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고맙기도 했고, 미안하기도 했다.

그래서 갈 때마다 빈손으로 가기 싫었다. 근처에 유명한 빵집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간단한 간식을 사 가거나, 친구 어머님을 뵙고 반찬을 받아다 주기도 했다. 크게 보답한 건 아니었지만, 그냥 그러고 싶었다. 그 공간을 당연하게 쓰고 있는 게 미안했다.

최근에 그 친구가 대학을 졸업하면서 자취방을 정리하고 완전히 본가로 올라오게 됐다. 마지막으로 짐을 정리하던 날, 차에 짐을 가득 싣고 올라오면서 자연스럽게 자취방 이야기를 했다. 이제는 다시 느낄 수 없는 그 공간의 편함과 자유, 아무 생각 없이 지내던 시간들이 조금 아쉽게 느껴졌다.

생각해 보면 그 자취방은 단순히 잠만 자던 공간이 아니었다. 내가 연애를 이어갈 수 있게 해 준 공간이었고, 사람 하나를 더 깊게 알게 해 준 공간이었다. 지금의 내가 결혼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 자취방도 분명히 한몫을 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그 자취방도, 그 시절도 없다. 하지만 그때의 고마움은 아직 남아 있다. 누군가의 공간을 빌려 지냈던 시간 덕분에, 나는 사람을 얻었고 관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가끔은 그 자취방이, 내 인생에서 꽤 중요한 장소였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의 이전글반대 방향으로 뛰던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