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하지 않게 오는 기회
학창 시절을 생각해 보면 나름 공부를 잘했었던 것 같다. 중학교를 다닐 때 까진 시험 성적도 좋았고 전교 부회장도 하면서 선생님들 사이에서 괜찮은 아이로 평가받았었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꿈이 과학자였고 학군 내에서 유명한 특목고를 가려고 준비까지 했었다. 물론 공부를 좋아한 건 아니었다. 성적이 잘 나오면 부모님이 좋아하시니까 열심히 했었다. 취미라고 할 것도 없었다. 그저 친구들과 게임하고 놀러 다니는 게 전부였다. 재미가 없었다. 남들이 다 공부를 하고 주변에서 공부를 잘하는 날 제일 좋아해 주는 것 같았다. 그러다 처음으로 공부를 잘하는 내가 아닌 다른 일을 하는 날 필요로 하는 곳이 생겼다.
열다섯 살 여름방학 때 일이었다. 교회를 다니고 있던 나는 교회 선생님에게 처음 듣는 제안을 받았다.
"교회 반주팀에 베이스가 필요한데 배워보지 않을래?"
난 베이스가 뭔지도 몰랐다. 그저 누군가가 학업에 관한 제안이 아닌 내가 전혀 모르는 분야를 제안한 것이 처음이라 신이 났다. 난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교회 선생님의 손에 이끌려 기타 학원에 처음 갔다. 기타를 실물로 처음 보고 만져보니 너무 신기하고 기타를 자유자재로 연주하는 내가 상상되었다. 앞에 기타 선생님께서는 베이스기타를 배우러 왔다는 교회선생님 말씀에 기분 좋은 목소리로 베이스기타에 매력과 연주들을 열심히 설명해 주셨다.(처음부터 베이스를 배우겠다는 학생은 잘 없다는 걸 이때는 몰랐다.) 내가 생각한 기타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상관이 없었다. 그냥 공부가 아닌 다른걸 빨리 배워보고 싶었다. 그렇게 학원을 나와 나는 얼른 집으로 뛰어가 부모님께 기타를 배우겠다고 말씀드렸다.
부모님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평소에 노래도 잘 안 듣는 내가 갑자기 악기를 배우겠다 하니 얼마못가 그만둘 것이라 생각하셨다. 그러면서 부모님은 얼마 후 있을 중각고사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오면 다니게 해 주겠다고 하셨다. 난 그 후로 악기를 배울 생각에 열심히 공부를 하고 배우지도 않은 기타를 사기 위해 용돈을 열심히 모았다. 그리고 다음 시험에서 지금까지에 성적 중 가장 좋은 성적을 받았다. 그렇게 베이스기타를 배우게 되었다.
처음 만져보는 베이스기타는 무거웠고 차가웠고 멋있었다. 기본기만 배우고 처음 배우는 화성학은 어려웠지만 재밌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베이스기타를 산 날 나는 내 몸 반만 한 베이스기타를 옆에 놓고 잠들었다. 베이스기타를 배우면서 내 학교생활을 바꿔줄 다른 인연이 찾아왔다.
언제나처럼 하교 앞에서 기타를 메고 학원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때 건너편에서 같은 학교 애들 무리가 소리를 질렀다.
"저기요! 그거 베이스예요?"
나는 갑작스러운 소리에 얼떨결에 "네"라고 대답했고 그 친구들은 소리를 지르며 길을 건너왔다. 그리고 내게 또다시 물었다.
"밴드부 안 해볼래요?"
학교를 다니면서 공부만 하고 전교부회장이라는 직책 때문에 선생님 심부름만 열심히 하던 내게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제안이었다. 나는 또다시 네라고 대답했다. 내 베이스기타 실력은 형편없었다. 이때가 배우기 시작한 지 3개월이 조금 안되었을 때라 기본기만 연습하는 중이었다. 밴드부 생각도 없던 내가 밴드부에 들어갈 수 있던 이유는 전교생에 베이스기타를 가진 사람이 나 하나였다. 오디션도 약식으로 교회에서 연주하기 위해 연습했던 간단한 찬송가를 연주했고 그마저도 실수 투성이었다. 난 그렇게 "네"라는 대답 두 번에 학교 밴드부가 되었다. 그 후로는 실력이 떨어지는 만큼 열심히 연습했다. 처음으로 학교축제 무대에 올라도 가보고 도에서 주최하는 밴드부 대회에 나가 수상을 하는 좋은 일도 생겼다. 나는 학교에서 얼굴은 몰라도 전교부회장에 밴드부 그 선배로 조금 유명해졌다.(이때 처음으로 연애라는 것도 해봤다.) 지금은 베이스뿐만 아니라 통기타와 일렉기타도 배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취미가 되었다. 나는 그때도 지금까지도 이런 뜻하지 않은 곳에서 기회가 찾아왔다. 그럴 때마다 내 대답은 "네"였다.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다. 해보고 안되면 더 열심히 한다. 안 맞는다면 빠르게 다른 길을 찾는다. 내 경험상 이런 기회들은 나에게 해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추억이 되고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공부를 잘하던 아이는 친구 따라 탁구부에 들어가 대회도 나가보고 삼촌의 영향으로 복싱을 시작해 특목가 아닌 특성화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이후에 대회도 나가 입상도 여러 하면서 복싱으로 대학도 갔다. 지금은 공부가 아닌 운동으로 취업해 먹고 살아가며 결혼도 했다. 모두 뜻하지 않은 기회로부터 만들어진 인생이었다. 그리고 요즘은 이렇게 글이라는 새로운 기회를 잡아보려고 한다. 뜻대로 안 돼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인생이 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