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로 늙는다는 것

어르신이 아닌 친구들

by 여담

근무 중 입국장 한 곳에서 신난 어린아이 같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머리가 하얗게 센 어르신 네 분이 나란히 입국장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각자 캐리어를 하나씩 끌고 있었고, 걸음은 느렸지만 표정은 유난히 밝았다. 장난기 가득한 눈빛들이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그분들의 웃음소리였다.

깔깔거리는 웃음이 입국장 한쪽을 가볍게 채우고 있었다. 오래간만에 만난 가족처럼 반가운 웃음도 아니었고, 조심스럽게 웃는 점잖은 미소도 아니었다. 딱 친구들끼리 여행을 다녀온 뒤 나오는 얼굴들이었다.

말투도 그랬다. 서로를 부르는 호칭이나 대화의 흐름이 유난히 편했다. 욕도 섞여 있었고, 농담도 거침없었다. 누가 봐도 오랫동안 함께 시간을 보낸 사람들, 서로의 성격을 다 알고 있는 사이처럼 보였다. 여행을 다녀왔다는 사실보다, 그 시간을 누구와 보냈는지가 더 중요해 보이는 얼굴들이었다.

그러다 한 어르신이 옆에 있던 다른 어르신의 엉덩이를 발로 툭 찼다. 장난기 섞인 행동이었다. 생각보다 세게 차셨다. 순간 주변 사람들이 흠칫했지만, 맞은 할아버지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때리지 마, 남아 있는 연골도 얼마 없어 임마.”
그러자 때린 할아버지가 기다렸다는 듯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얼마 전에 새로 갈아서 튼튼해.”
그 말을 듣는 순간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대화 속에 등장하는 단어들은 분명 나이가 느껴지는 말들이었지만, 말투와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서로를 놀리는 방식도, 타이밍도 꼭 젊은 친구들 같았다.

그 모습을 보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분들을 ‘어르신’으로 보고 있었지만, 그분들 자신은 전혀 그렇게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나이 든 사람들처럼 행동하기보다는, 그냥 오래된 친구들처럼 굴고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연세가 많아 보일지 몰라도, 그들 안에서는 여전히 친구라는 이름으로 같이 웃고 떠들고 있었다.

나도 친구들과 있으면 별 다를 게 없다. 쓸데없는 말로 서로를 놀리고, 바보 같은 이야기로 웃고, 굳이 점잖을 필요 없는 말투를 쓴다. 가끔은 스스로도 “어디 가서 말 못 하겠다.” 싶은 표현들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다. 그래도 그 시간이 좋다. 그 모습이 편하다. 그게 나라는 느낌이 든다.

친구들과 있으면 유난히 바보처럼 된다. 하다못해 아내에게도 보여주기 민망한 행동들을 하고 가감 없이 서로를 헐뜯기도 한다.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할 수 없는 친구라서 가능한 것들이다. 서로에게 장난치고 놀려도 웃어넘기고 괜찮은 사이다. 그러다 도가 지나쳐 기분이 상하더라도 그것조차 참지 않는다. 그리고 금방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다.

입국장에서 본 그 어르신들을 보며 저렇게 늙어가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어도 말투가 달라지지 않고, 친구들 앞에서만큼은 여전히 철없는 얼굴로 웃을 수 있다면, 그건 꽤 괜찮은 노년이 아닐까 생각한다. 몸은 변하고, 단어는 바뀌어도 관계의 온도만큼은 그대로인 삶이다.

그날 내가 본 건 여행을 다녀온 어르신들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함께 살아온 친구들이었다. 입국장을 나오는 네 명의 모습은 나에게 나이 든 미래를 보여주는 장면처럼 느껴졌다. 점잖아지지 않아도 되고, 굳이 어른스러워질 필요도 없는 모습. 친구들 앞에서만큼은 끝까지 친구로 남는 사람들.
나도 그렇게 나이 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여전히 친구들과 바보 같은 말을 주고받고, 서로를 놀리며 웃고, 입국장을 나올 때까지도 깔깔거릴 수 있는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

그날 입국장에서 스쳐 지나간 네 명은 나에게 그런 미래가 나쁘지 않다는 걸 조용히 알려주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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