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하지 않은 현실에 남아있는 이유
“제가 가장 재밌게 본 드라마는 ‘여우각시별’입니다. 이 드라마를 통해 공항에서 일하는 것을 처음 상상했습니다.”
이 문장은 놀랍게도 내가 공항에 취직하기 위해 썼던 자기소개서의 첫 문장이다. 다른 사람들처럼 거창한 사명감이나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그저 드라마를 봤고, 그 공간이 좋아 보였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멋있어 보였다.
공항이라는 장소가 주는 설렘, 떠남과 만남이 동시에 존재하는 공간, 그 안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이야기들 속에 나도 들어있고 싶었다.
드라마 속 공항은 언제나 특별했다. 주인공들은 각자의 사연을 안고 바쁘게 뛰어다닌다. 사건이 터질 때마다 긴박한 음악이 흐르며 모든 문제가 멋지게 해결됐다.
나는 그 장면들을 보며 나도 저곳에 가면 멋있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의 하루에 중요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정말로 나는 공항에서 일하게 됐다.
다만, 드라마는 드라마였고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다르고 거칠었다. 현실의 공항에서도 사건은 발생한다. 응급 환자가 생기고, 누군가는 난동을 부리고, 예상하지 못한 상황들이 쉴 새 없이 생긴다. 드라마와 다른 점이 있다면 배경음악이 없고 전혀 멋있지도, 파란만장하지도 않는다.
멋있게 달려가는 장면 대신, 숨이 턱까지 차오른 채 죽어라 뛰어가는 내 숨소리만 들린다. 제압 장면도 화려하지 않다. 아무리 심하게 난동을 부려도 정해진 조건과 상황이 맞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사람에게 손을 댈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팔을 벌리고 몸으로 막는 것, 그저 그 자리에 서서 시간을 버는 일뿐이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전혀 멋있지 않은 모습이다.
영웅도 아니고, 주인공도 아니다. 현실의 공항은 드라마보다 훨씬 긴박하고, 때로는 무섭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이 일은 싫어지지 않았다.
공항에는 늘 웃음이 있다. 여행을 앞둔 설렘,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의 얼굴, 들뜬 목소리와 들고 있는 캐리어들. 그 풍경을 매일 가까이에서 본다는 건 생각보다 큰 보람이다.
내가 직접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그 공간이 잘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다.
가끔은 이용객에게서 감사 인사를 받는다. 대단한 일을 해서가 아니라, 그저 길을 안내했거나, 불편한 상황을 조금 덜 불편하게 만들어 줬을 뿐인데도 “정말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이 일이 괜히 좋다.
이 일의 가장 큰 특징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가 눈에 띄지 않고, 우리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될수록 공항은 평화롭다. 문제가 없다는 건, 우리가 제 역할을 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평화로움이 이 일을 계속하게 만드는 이유다. 로맨스 코미디 장르의 드라마를 보고 공항을 꿈꾸던 학생은 지금 스릴러와 느와르, 그리고 코미디가 뒤섞인 공항에서 일하고 있다. 화려하지 않고, 멋있지도 않지만 사람들의 웃음이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 있도록 조용히 자리를 지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면접 당시, 마지막 질문이 아직도 기억난다.
“공항에서 일해야 하는 이유가 뭔가요?”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들은 웃고 설레고 신나는 감정을 가지고 공항에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 감정들 뒤에는 공항이라는 공간이 안전하다는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깔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생각들이 변하지 않게 지키고 싶어서 공항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지금도 그 대답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드라마에서 시작된 선택이었지만,
현실에서 계속 남아 있게 만든 건
그 평범한 웃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