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사람

아버지의 등과 종아리

by 여담

어릴 때 아버지 차를 타면 나는 늘 조수석에 앉았다. 뒷자리는 잘 선택하지 않았다. 조수석이 더 넓어 보였고, 앞유리창을 그대로 바라볼 수 있어서 좋았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보고 있으면 마치 내가 직접 운전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 운전석에 앉은 아버지가 유독 커 보였다. 단순히 운전대를 잡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아버지는 늘 든든하고 멋있어 보였다. 그때는 그 모습을 어른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아버지는 항상 큰 사람이었다. 흔히 말하는 윗사람, 어른이라서 큰 사람이라는 뜻도 있지만 정말 말 그대로 ‘큰 사람’이었다. 키나 체격이 어린 내가 볼 때 담벼락 같았다.

같이 있으면 괜히 마음이 놓였고, 그 옆에 있으면 세상이 조금 단단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와 다닐 때면 “아버지 닮았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럴 때마다 나도 언젠가는 아버지처럼 엄청 큰 사람이 될 것만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말속에서 내가 닮고 싶었던 건 얼굴이나 체형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가진 어떤 분위기였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자연스럽게 키가 크고 덩치가 커졌다. 이제는 아버지보다 키도 더 크고, 등도 더 넓다. 예전에는 올려다보던 아버지를 이제는 내려다보게 됐다.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가 앉던 운전석에 내가 앉는 게 자연스러워졌고, 그 자리가 생각보다 작게 느껴질 만큼 시간이 흘렀다. 아버지는 어느새 할아버지라는 말을 듣는 나이가 되셨다. 예전보다 확실히 작아지셨고, 체력도 예전 같지는 않다.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 나는 아버지보다 크고, 더 젊다. 그런데도 여전히 아버지 옆에 서 있으면 다시 작아지는 것 같다. 흔히들 말하는, 나이가 들며 점점 약해지고 작아지는 아버지의 뒷모습과는 조금 다르다. 물론 배도 나오고, 누가 봐도 ‘아저씨' 소리가 자연스럽게 나올 모습이 되셨다. 하지만 그 분위기만큼은 여전히 거대했다. 쉽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아버지가 서 있는 자리에는 묘한 무게감이 있었다.

작년에 가족들과 일본으로 여행을 갔었다. 비가 조금씩 내리던 날, 숙소까지 걸어가고 있었다. 아버지가 앞장서서 걷고 있었고, 나와 동생은 몇 발짝 뒤에서 따라가고 있었다. 비가 아주 많이 오는 건 아니었지만, 우산도 없이 걷는 아버지를 보며 혹시 여행 중에 감기라도 걸리시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때 동생이 조용히 말을 걸었다.
“형, 아빠 좀 봐봐.”
동생의 말에 아버지를 다시 바라봤다. 비에 젖은 옷이 몸에 딱 붙어 있었다. 그 순간 눈에 들어온 건 얼굴이 아니라 등과 종아리였다. 옷 위로 그대로 드러난 등의 근육들이 각자 자기주장을 하고 있었고, 종아리에는 심장이 하나씩 박혀 있는 것처럼 선이 선명했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아까 들었던 걱정이 싹 사라졌다. 감기 걱정이 아니라, 괜히 웃음이 나왔다.

조금 웃기고 가볍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장면이었지만, 아버지는 그 등과 종아리로 우리를 키우셨다.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보여주지 않아도, 그동안의 삶이 그대로 몸에 남아 있었다. 그 흔적들이 예전 모습 보다 더 단단하고 선명해 보였다. 그 근육들이 시간이 지나 나와 동생이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단련되어 있었다.

분명 나는 키도, 덩치도 아버지보다 크다. 솔직히 힘은 아직 모르겠지만 내가 더 강해질 만큼에 충분한 시간이 지났다.

이제는 내가 앞장서서 걷는다. 하지만 아버지는 나보다 확실히 더 강하다. 그 강함은 근육의 크기나 체력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시간이 지나 더 나이를 드시고, 언젠가는 근육도 빠지고 걸음도 느려질 것이다. 그래도 아버지의 강함은 변하지 않을 것 같다. 그 강함은 몸이 아니라 삶에서 티가 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늘 말수가 많지 않았다. 크게 가르치려 하지도 않았고, 무언가를 강요하지도 않았다. 대신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켰고, 해야 할 일을 해냈다. 그 시간이 쌓여 지금의 아버지를 만들었고, 나는 그 곁에서 자랐다. 그래서 여전히 아버지 옆에 서면 마음이 조금 느슨해진다. 이제는 내가 조수석이 아니라 운전석에 앉아 있어도, 길을 더 잘 알고 있어도, 아버지가 곁에 있으면 괜히 한 박자 천천히 가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릴 때는 아버지가 커 보였고, 지금은 내가 커졌다. 하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큰 사람이다. 그 사실은 시간이 지나도, 역할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다. 나도 언젠가 아버지처럼 큰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몸의 크기가 아니라, 삶의 무게로 그렇게 서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일본의 비 오는 거리에서 본 아버지의 등과 종아리는, 아마 오래도록 내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그리고 그 기억은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알려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사람이 남기는 허탈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