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ep2
기다림 ep1과 같은 날,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있었던 일이다.
너무나 화사하고 밝았던 그 사람의 곁에 빛바랜 군청색 모자가 보였다. 세월의 괴롭힘이 고스란히 남은 얼굴과, 그와 대비되는 왜소하지만 올곧은 자세로 벤치에 앉아 있던 어르신이었다. 짙은 회색 정장을 단정히 차려입고, 머리에는 오래된 군청색 모자를 쓰고 계셨다. 모자에는
“6.25 참전유공자”
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밝게 웃으며 기다리던 그 사람과 달리, 어르신은 조용히 눈을 감고 계셨다. 다들 조금은 들떠 있는 공항 입국장 앞에서, 어르신은 담담한 얼굴로 누군가를 기다리고 계신 듯했다.
한 시간 남짓 같은 자리에, 같은 자세로 앉아 계시던 어르신이 천천히 일어나 나에게로 다가왔다. 내 앞에 선 어르신은 굵직한 필체로 적힌 노란 포스트잇을 건네며 물으셨다.
“선생님, 바쁘신 와중에 죄송합니다. 이 메모에 쓰인 비행기가 언제쯤 도착하는지 알 수 있을까요?”
단단하면서도 온화한 말투였다. 한참 어린 나에게 지나치다 싶을 만큼 정중하게 부탁하시는 모습에, 소소한 감동이 밀려왔다.
공항에서 일을 하다 보면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나는 얼른 메모지를 확인했다. 메모지에는 간단히 “KE035” 다섯 글자만 적혀 있었다.
공항 전광판을 확인하니 애틀랜타에서 출발해 오전 11시에 도착 예정인 대한항공 비행기였다. 나는 어르신께 설명드렸다.
“11시에 들어오는 비행기입니다. 20분 정도면 도착할 거고요. 착륙 후 입국장까지 나오시려면 30분에서 길게는 한 시간 이상 걸릴 수도 있습니다.”
어르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 번 정중히 감사 인사를 하셨다. 메모지를 돌려받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오른손으로 메모지를 받으시던 어르신의 손에는 엄지와 검지 손가락을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이 없었다. 반대편 왼손에는 낡은 영자신문이 들려 있었다.
가까이에서 마주한 어르신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보다 더 깊어 보이는 화상 자국이 남아 있었다. 내가 순간적으로 놀란 기색을 보이자, 어르신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하시고 천천히 입국장 앞 벤치로 돌아가 앉으셨다. 실례를 범한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워졌다.
시간이 흘러 비행기가 도착했고, 입국장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기다리던 사람들은 하나둘씩 서로를 만나며 입국장을 떠났다. 하지만 어르신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앉아 계셨다. 나는 기다리시던 분이 조금 늦어지나 보다 생각하며 다음 업무를 위해 자리를 옮겼다. 그때가 정오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다시 입국장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르신은 아직도 그 자리에 앉아 계셨다. 시계는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르신은 다섯 시간이 넘도록 한 자리를 지키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계셨다.
나는 급히 공항 안내 직원에게 부탁해 어르신을 도와드릴 수 있는지 확인해 달라고 했다. 안내 직원은 어르신께 다가가 이야기를 나눈 뒤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 어르신께서 친구분을 기다리고 계신데 아직 나오지 않아, 혹시 입국 과정에 문제가 있었는지 알아봐 달라고 하셨다는 것이었다.
확인해 본 결과, 해당 비행기 승객 중 입국에 문제가 생긴 사람은 없었다. 나는 다시 어르신께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르신, 아까 오전에 도와드렸던 직원입니다. 혹시 메모를 다시 한 번 확인해 봐도 될까요?”
메모지에는 여전히
KE035
다섯 글자만 적혀 있었다. 어르신은 혹시라도 친구분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지 걱정하고 계셨다.
나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다.
“오늘 이 비행기로 들어오신 분들 중 아직 입국을 못 하신 분은 없다고 합니다. 혹시 엇갈리셨을 수도 있으니, 연락을 한 번 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어르신은 낡은 영자신문을 팔 사이에 끼운 채 어딘가로 전화를 거셨다. 전화기 너머의 상대는 따님이셨다. 어르신은 오늘 ‘존’이라는 이름으로 온 메일이 있는지 확인해 달라고 하셨다.
잠시 후,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대답은 어제 아침 주고받은 메일이 마지막이라는 것이었다. 몇 마디 더 대화를 나눈 뒤, 어르신은 조용히 전화를 끊고 내게 다가오셨다.
“선생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친우가 무슨 일이 있어 들어오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오랜 시간 신경 쓰이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담담하던 어르신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었다. 손에 들린 영자신문도 미세하게 흔들렸다. 나는 도와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밖에 전할 수 없었다. 어르신은 모자를 고쳐 쓰시고는 천천히 공항을 떠나셨다.
그날 나는 같은 시간, 같은 입국장에서
가장 젊은 날의 가장 밝은 기다림과
오랜 세월을 버텨온 참전용사의 조금은 씁쓸한 기다림을 함께 보았다.
어르신이 떠난 뒤, 다시 한 번 입국 상황을 확인했다. 여전히 문제는 없었다. 그러다 문득, 입국 승객이 아닌 환자 발생 메신저를 확인하게 됐다. 그곳에 한 건의 알림이 떠 있었다.
“11시 23분 KE035 애틀랜타발 인천행 비행기 응급환자 발생. 환자 상태 심정지. 80대 미국인 남성. 외부 병원 이송.”
나는 그저 우연이길 바랐다.
내가 떠올린 그런 슬픈 일이 아니길,
빛바랜 군청색 모자와 낡은 영자신문이 다시는 떨리지 않기를 조용히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