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브리 빠들을 익숙한 환상으로 초대하는 영화
오늘은 필름 기록이 아닌 영화 기록. 본 영화에 대해서 길게 감상을 남기는 편이 아니지만, 이 영화만큼은 내가 느꼈던 것을 그대로 정리해 두고 싶어서 쏘삭쏘삭 써 보려 한다.
우선 이 영화가 극장에서 개봉했을 때 당장 뛰어가지 않았던 것을 이제 와서 후회한다. 지브리 팬들을 만족시킬 만한 영화라는 선전을 그렇게나 들었고, 나 역시 엄청난 기대를 하고 있었음에도 막상 영화가 걸리고 나니 왠지 발길이 안 떨어지고 미적거리게 되었다. 그때 일이 너무 바빴다는 변명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실망할 것이 두려워서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지브리에서 만든 모든 작품을 다 보았고 어떤 것은 수십 번 수백 번도 보았지만(하야오 영감님께는 죄송) 당연히 실망스러운 작품도 있었고 썩 와 닿지 않는 작품도 있었다. 그런데 미야자키 하야오의 '마지막 작품'이라고까지 하는 이 영화를 보고 실망하면 어쩌나, 내게는 와 닿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어떤 두려움이 있었다. 오래 좋아한 가수가 아주 오랜만에 신보를 낸다고 하면 반가운 한편 불안해지듯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다.
해서, OTT에 이 영화가 올라오고서야 비로소 켜 볼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여태까지 '왜 영화관에서 보지 않았을까……!'하고 후회 중이다. 생각날 때마다 계속 후회할 것 같다.
주인공 '마히토'는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와 함께 새어머니의 집으로 가게 된다. 이곳은 마히토의 어머니가 어릴 적 살았던 집이기도 하다. 새어머니가 어머니의 동생이기에(……) 마히토는 어머니를 잃은 슬픔으로 일찍 성숙한 것처럼 보인다. 그 나이다운 치기 어린 고집이나 철없는 면모를 가지고 있지만 조숙한 아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이 완성된 듯 완성되지 않은 소년은 이상한 왜가리를 만나 '어머니가 살아있다'는 말을 듣게 되어 혼란에 빠진다. 그리고 숲 속으로 사라진 새어머니를 찾아 구하기 위해 기이한 저택으로 가게 된다.
1. 왜가리와 메기, 그리고 두꺼비들
가장 먼저 '아, 지브리다!' 했던 장면은 왜가리가 마히토를 저택으로 꼬여내는 장면에서, 메기와 두꺼비들이 '와 주십시오'라고 하며 마히토를 에워싸는 것이었다. 일본에서는 메기가 날뛰면 '지진이 일어날 징조' 혹은 '재난이 일어날 징조'라고 해석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두꺼비는 독을 가졌으며 동화나 이야기 속에서 보통 거짓말이나 불길한 일을 담당한다. 메기와 두꺼비가 마히토를 에워싸며 '와 주십시오'라고 하는 장면은, 마히토의 미래에 일어날 어떤 변화, 재난과도 같은 큰 변화를 의미하는 동시에 그 일이 무척 위험하고 거짓으로 가득 차 있을 것임을 암시하는 듯했다. 지브리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동식물은 단순히 귀여운 것을 넘어 그 자체로 자연과 예언, 미신, 거대한 힘이나 혹은 스러지는 세월이나 세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마히토가 두꺼비들에게 에워싸여 꼼짝도 할 수 없는 그 장면, 자신에게 닥쳐오고야 말 운명 앞에서 달아날 수 없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마히토를 그러한 재난으로부터 구원해준 새어머니의 화살이 앞으로 이어질 두 사람의 관계를 드러내 주는 것이 정말 좋았다.
2. 와라와라들과 불의 소녀 히미
마히토가 이세계에서 만난 '와라와라'들은 언뜻 <원령공주>에 등장하는 정령, 혹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이웃집 토토로>의 알 수 없는 작은 생명체들을 연상시킨다. 그와 비슷한 것이지만 또 다른 것이, 이 '와라와라'들은 위쪽 세상, 즉 현실에서 인간으로 태어나기 전 단계에 있는 것들이다. 픽사의 <소울>과 약간 결이 비슷하다고 할까? 하지만 그들과 달리 와라와라는 썩 대단한 자아가 있어 보이지는 않고, 그저 와글와글 몰려다니며 귀여울 뿐이다. 자연적이고 맑은, 아직 어떤 것으로도 정의되지 않는 혼들의 군집은 하나의 세계로 탄생하기 전 존재하는 혼돈 같다. 하야오 영감님의 정확한 의도야 알 수 없겠지만 와라와라를 보면서 그저 존재할 뿐인 혼돈의 불규칙과 해맑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인간 개인이든 혹은 세계 전체이든, '어떤 것'으로 정의되기 시작하면 더 이상 그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와라와라들은 마히토로 태어날 수도 있고, 히미로 태어날 수도 있고, 마히토의 아버지나 혹은 죽어갈 병사로 태어날 수도 있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정의되지 않은 것들. 그러나 정의되는 순간 스스로가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또 세상에 소속되어 거대한 움직임을 만드는 것들. 전쟁과 질병과 슬픔이나 아픔을 만들어내는 인간들 모두가 한때는 와글와글 몰려다니는 와라와라였다고 생각한다면 세상이 이토록 험악해진 것은 어떤 이유일까? 세상을 불균형하게 만든 창조주(마히토의 조상인 할아버지로 등장하는)의 탓일까? 혹은 또 다른 이세계에서 날아온 어떤 거대한 재난이나 불행 때문일까? (스티븐 킹의 <그것>처럼 말이다)
불의 소녀 히미는 이세계를 '새'들로부터 지키는, 수호신과 비슷한 존재이면서 또한 인간이다. 히미는 새들이 와라와라를 잡아먹을 수 없도록 쫓아내고, 마히토를 앵무들에게서 구해주며 새어머니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히미가 가진 힘, 불은 인간이 소유하게 된 태초의 에너지이며 불이 있었기에 인간은 비로소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어두운 혼돈을 한 꺼풀 걷어내 준 불의 힘을 가진 히미는, 그 자체로 어지러워진 이세계를 정화하는 역할을 한다.
히미에 대한 이야기 중 미야자키 하야오의 실제 손녀에 관한 이야기를 본 적 있는데, 사실인지 아닌지는 애매하나 하야오 영감님이 자신의 뒤를 이어주기 바랐던 손녀가 있었다고 한다. 결국 손녀는 원화가의 길을 걷지 않아 불발되었고 영감님이 매우 애석해 했다고 하는데, 이 히미가 그 손녀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히미가 어지러운 이세계를 정화하는 능력, 강력한 불의 힘을 가졌으면서도 그 힘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닌 점이 더욱 잘 이해가 된다.
하야오 영감님이 일본의 애니메이션 시장을 오래도록 비판해 왔다는 것은 많이들 아는 사실이다. 재능으로 똘똘 뭉친, 인류애를 가진 꼬장꼬장한 예술가 영감님이 보기에 지금의 서브컬처 문화가 얼마나 좌절스러울지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 마히토가 여행한 혼란스러운 이세계가 현재의 서브컬처 시장이라면, 히미는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곳을 다시 한 번 새롭게 만들 수 있는 적합한 후계자였던 게 아닐까. 때문에 히미가 그 세계를 자유로이 누비며 '새'로 대표되는 어지러운 것들을 쫓아내고 몰아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한편으로 히미는 와라와라들을 '살리려고 노력'하지는 않는다. 히미가 가진 힘은 탐욕스러운 새들을 쫓아낼 수 있지만 와라와라 역시 불태울 수 있다. 와라와라가 하나의 세계, 즉 개인으로서의 인간이 되기 전의 혼돈이라면 히미의 힘 앞에 무력한 것도 이해가 된다. 히미가 가진 불의 힘은 굳건한 자아를 가진 이가 휘두를 수 있는, 이미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지만 새나 와라와라들은 그저 존재하는 것들이니까.
3. 문
마히토는 이세계에서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문을 찾게 된다. 작품 막바지에서 마히토는 히미에게 '같이 나가자'고 하지만 히미는 자신이 나가야 하는 문은 따로 있다며 함께 갈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불은 무섭지 않다, 너를 낳는 것은 멋진 일이라고 말하며 마히토를 안아준다.
과거는 바꿀 수 없는 것,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문 즉 자신만의 인생이 있는 것, 그 인생을 선택하는 삶의 태도. 히미는 결과를 알면서도 자신의 인생을 선택했고 마히토 역시 히미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이 부분에서 마히토는 진정한 성장을 이루었다고 본다. 자신의 선택에 책임감을 가지며 다른 사람의 선택을 존중할 줄 알게 되었다는 점이.
4. 앵무
앵무들의 지배 하에 놓인 이세계는 처음부터 그리 어지러운 곳이 아니었다. 앵무들은 처음에는 '작았다'. 그러나 점점 거대해지고 수가 많아지면서 세계를 혼란에 빠뜨리게 되었다.
이 작품에서 새들은 긍정적인 의미를 갖지 않는다. 탐욕과 무지성적인 집단을 상징한다. 앵무는 '다른 사람의 말을 따라하는' 새다. 자신의 의도나 사고가 있다기보다는 그럴싸하게 흉내를 내는 것이다. SNS를 중심으로 서브컬처 문화가 완전히 일상이 되어버린 지금, 우리는 어디서나 앵무를 볼 수 있고 우리 역시 앵무로서 살아가고 있다. 스스로 사고하는 능력을 점차 잃어가면서 자극만을 추구하고, 탐욕을 부리며,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려 하지 않는다. 이 앵무들이 만든 세상은 그래서 끔찍하다. 한 작품이 히트를 치면 비슷한 작품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고, 인간이나 세계를 직접 경험하지 않은 채 서브컬처 속 세계를 복제하여 또 하나의 서브컬처를 만들고, 만화 속 인간만을 보고 또 다시 만화나 소설 속 인물을 만드는 과정 속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서브컬처 작품들은 점점 더 현실과 동떨어져 간다.
그러한 작품들은 대부분 힘이 없다. 그저 머릿수만 많을 뿐이다. 히미가 이들을 쫓아버릴 수 있는 이유도 그래서가 아닐까? 굳건한 하나의 세계, 하나의 자아와 무지성적인 집단, 혹은 타인을 모방했을 뿐인 허상의 자아. 어느 쪽이 더 강인한지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
'문'과도 이어 말하자면, 히미와 마히토는 자신의 '문' 즉 자신의 삶을 책임과 함께 선택했지만 앵무들은 그렇지 않았다. 다만 무너지는 세계를 피해 열린 문으로 뛰쳐나갔고, 그러자 단순하고 평범한 앵무로 되돌아갔다. 모방과 시늉으로 점철된 것들은 그 진짜 모습을 드러냈을 때 초라하기 그지없어진다. 고민 없이 만들어진 것들은 쉬이 무너지게 마련이다.
5. '할아버지'의 세계
마히토가 이세계에서 만난 '할아버지'. 히미와 마히토의 조상이기도 한 그는 이 세계를 발견했고 창조했으며 조립했다. 이 '할아버지'를 미야자키 하야오의 아바타라고 풀이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나 역시 그런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노인은 오랜 세월 불안정한 세계를 지켜 왔지만 이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닫고 후계자가 될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서브컬처에 평생을 바친 사람이고, 각종 유행이 난무하는 와중에도 '지브리'의 색을 잃지 않기 위해 고민을 거듭해 왔다. 그 과정에서 그가 느꼈을 경이와 놀라움, 환멸과 슬픔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것을 보여주듯 노인은 매우 늙었고 또한 지쳐 있다. 자신이 세계를 제대로 구성하지 못 했다는 일종의 책임감, 혹은 죄의식 비슷한 것도 가지고 있다. 때문에 그에게는 후계자가 절실하지만 마히토는 자신 역시 '악의를 가졌으며' 깨끗한 존재가 아니라고 대답하여 후계자 자리를 거절한다. 결국 그것은 마히토의 대답이기도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 앞에 드러난 현실일지도 모르겠다. 노인과 마히토 사이에는 여러 세대가 놓여 있고, 그것은 어떤 힘으로도 넘을 수 없는 벽이다. 마히토가 가장 적절한 후계자감이라 하더라도 결국 마히토가 완벽한 세상을 구축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것을 노인도 알고 마히토도 안다.
노인은 결국 마히토의 선택을 존중하며 붕괴하는 세계와 함께 사라진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루고 쌓았던, 그가 생각하고 꿈꿨던 서브컬처의 세계는 사실 오래 전부터 무너지기 시작했고 지금도 착실히 무너지고 있다. (하야오 영감님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렇다고 생각한다) 노인은 그 사실을 부정하지도 원망하지도 않고 다만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것이 포기라고 느껴지지 않은 것은 마히토와 히미를 그들의 세상으로 돌려보내주기 위해 마지막까지 조언해 주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마히토도 히미도 이 세계의 후계자가 되기를 택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또 그들의 삶을 살아가며 새로운 세계를 구축해 나갈 것이므로.
이 작품에 대한 진짜 감상은 아마 앞으로도 오랫동안 말하기 힘들 것 같다. 분명한 것은 이 작품이 지브리 빠들을 위한 작품이었다는 것이고, 익숙한 환상으로 초대하여 지브리의 세계를 되짚어보게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다. 호불호가 많이 갈렸다는데, 그래서가 아닐까 싶다. 나처럼 지브리의 모든 세계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 이야기는 처음이자 끝과 같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래서 뭔 소리야?' 싶기만 한, 설명이라고는 없는 지루한 영화이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