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늘 살다 보면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아주 사소한 것부터 중요한 것까지도 전부 선택의 연속이다. 오늘 먹을 저녁 메뉴를 고르는 데에도, 오늘 입을 옷을 고르는 데에도, 혹은 꿈과 같은 자신만의 목표를 정하는 데에도 선택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선택의 기로에 놓이는 이유는 그 선택지들의 무게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49대 51 정도. 아마 10대 90, 20대 80 이런 차이라면 선택이라고 할 것도 없었을 테니까.
나도 아직까지 완벽히 고치지는 못한 병이지만, 흔히들 말하는 ”선택 장애“라는 것을 가지고 있어, 무엇하나 스스로 선택하기가 참 어렵다. 정확히는 무게의 경중을 느끼지 못해서 고르지 못한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래서 사소한 것을 고를 때에도 주변 사람들에게 선택을 맡기기 일쑤이고, 중요한 것은 고민의 고민을 하고, 아는 사람들에게 최대한 많이 물어보고는 한다. 결국, 그것 마저도 선택지의 무게를 알기 위한 것이 아닌 과반수 투표를 하듯 한 것일 뿐이지만.
이렇게 어느 것도 선택을 잘하지 못했던 내가 이를 약간 고칠 수 있었던 방법을 말하자면 아주 간단하고, 어쩌면 막무가내인 것처럼 보이는 방법이다.
그냥 아무거나 고르는 것.
조금이라도 더 끌리는 것을 고르는 것이 아니다. 정말 아무거나. 그렇게 선택에 고민을 얹지 않고 그냥 선택을 해버린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것도, 잘못되는 것도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고민을 하는 대다수는 49대 51 정도. 단 2의 차이로 고민을 하기 때문이다.
내가 조금 낮은 49를 선택했을지라도 51과는 단 2의 차이만 있을 뿐, 그것은 느껴지지도 않을 수 있고, 그 차이가 느껴진다고 할지라도 고작 손해 보는 건 2일뿐이다. 내 선택이 좋지 않은 결과가 있더라도 다른 선택은 2만큼만 더 좋았을 뿐이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의 머리가 아프게 하는 선택지가 생길 때마다 아무거나 얼른 선택하고는 한다. 어차피 거기서 거기인 거면, 머리가 덜 아프게 만드는 것이 더 좋지 않는가.
물론, 누군가는 너무 무책임한 방법이라고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신중하게 선택해야 하는 선택지도 있기도 할 테니까. 단지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도 잘 살아갈 수 있을 테니 머리가 아플 정도로 선택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는 아무 선택을 해도 괜찮다고 이야기해 주고 싶을 뿐이다.
나는 확신한다. 내가 살아오면서 51이라는 선택만 하지는 않았을 것임을. 당연히 손해를 보는 선택도, 잘못된 선택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풍요롭다는 의미가 아니다.) 결국 어떤 선택을 해도 우리는 그 선택에 맞춰서라도 살아간다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아닐까.
선택을 하는 것 때문에 꽤나 오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아무 길이나 선택해서 나아보는 것은 어떨까 합니다. 인생의 막다른 길은, 우리가 갇혀버리는 길은 없으니까. 늘 맞는 선택만 하지 않았을 텐데도 어떻게든 여기까지 온 자신의 모습을 보면 틀린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