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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동인 Nov 12. 2024

결혼? 쉬운 줄 알았더니 머나먼 길이었다 16화

희망이 없었던 80년대 시절

이화가 내게 마지막 전화를 걸어왔었던 시기는 내가 23살이 되었던

1983년 초 봄이었다. 그때까지도 직장을 구하지 못했던 나는 극심한 경제적 빈곤에 시달리게 되었고 주머니에는 친구와 만나서 소주 한잔 기울일 돈조차도 없었다.

연애도 돈이 있어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여자에게 커피 한잔 사 줄 돈조차 없는 남자가 어떻게 여자 앞에서 어깨를 피고 마주 할  있겠는가. 어쩜, 이화와 다시 만났다 할지라도 무능력한 나의 모습을 보고는 이화가 실망해서 나의 곁을 다시 떠나는 그런 상황이 됐을지도 모르는 터, 차라리 즐거웠던 옛 추억들이 서로의 가슴속에 남아있을 때 헤어지는 것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남녀 간의 인연이란 강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이지 자신의 노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1983년 대한민국은

5 공군사독재정권의 서슬 퍼런 탄압을 받던 시절이었다. 밤이고 낮이고 가릴 것 없이 거리에는 독재정권 타도!~살인마 전대갈은 물러나라!~는 구호들을 외치며 대학생들과 일반 시민들까지 뒤 섞여 격렬한 시위를 하고 있었다.
전경들이 시위대를 향해 쏘아대는 최루탄의 매캐하고 희뿌연 연기에 휩싸여 대한민국은 심한 몸살을 앓고 있었고 지나가던 택시 안까지 굴러 들어온  최루탄이 터지는 바람에 운전기사와 승객이 기절했다는 신문보도가 나오기도 하였다.

그렇게,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당장 내일이라도 지구상에서 없어지는 게 아닌가 할 정도로 사회는 극심한 혼란에 싸여있었다. 그러나 직업도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고단했었던 나는 대학생들의 시위에 동참하지 않았다.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단 한 번도 체험해 보지 못하고 오랜 독재정권에 길들여 있었던 나로서는 그 들의 행동들은
대한민국 사회를 전복시켜서 무정부 상태로 만들라!~고 하는  북한 김일성의 지시를 받는 폭도들처럼 보였다. 또한 대부분의 언론들도 연일 그런 식으로 보도를 해대니 나 같은 민초들은 언론의 공작에 놀아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직장에 취업을 해서 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 만이 유일한 목표였던 나에게는 민주화를 외치며 시위를 하는 대학생들을 볼 때마다 속에서 불 같은 것들이 치밀어 올라왔다. 그 들은 부모 잘 만나서 편하게 공부하며 대학에 들어간 주제에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쓸데없이 거리로 뛰쳐나와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려는 무리들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포도청 관할구역을 벗어나는 게 급선무였던 나는 대학생들이 시위들 하든 말든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우연히 전봇대에 붙은 구인광고를 보고 가까스로 직장을 구할 수가 있었다.

지금이야 인터넷, 벼룩시장 같은 정보지를 통해서 쉽게 취업을 할 수 있지만 80년대에는 전봇대나 벽에 붙은 구인광고를 보고 직장을 구하는 게 일반적이었던 시절이었다.
내가 취업한 직장은 가죽점퍼를 수출하는 회사였고 약 300평 정도의 지하 공장에서 많은 여공들이 분주하게 재봉틀을 돌리며 가죽점퍼를 생산하고 있었다. 환기조차 되지도 않는 지하여서 그런지 가죽점퍼를 생산할 때 발생하는 희뿌연 먼지로 공장 안은 가득 차 있었다.


 얼마나 먼지가 많이 나는지 머리카락과 눈썹에는 마치 서리가 내려앉은 것 같은 흰 먼지가 가득 내려앉았다. 나는 그곳에서 미싱사를 보조하는 일명, 시다로 일을 하게 되었는데 미싱사들의 횡포가 얼마나 극심한지 혀를 내 두를 지경이었다.
조금이라도 일을 잘 못하면 실패가 내 면상을 향해 날아오곤 했었고 그것에 얼굴을 맞자 성질이 났던 나는  실패를 집어서 내게 던진 미싱사에게 냅다 던지며 한 마디 하였다.

이봐요!~그냥 말로 하면 될 것이지 왜 실패를 내게 던지는 거야!~~

나의 벼락같은 성질에 놀란 미싱사는 조금 당황한 기색이 보였는데 성질 더러운 녀석이라고 여겼는지 그 후부터는 내게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시다들은 미싱사들의 그 어떠한 횡포도 묵묵히 받아주는 것이 관례였기에 나에 대한 인식은 깔 하는 녀석이라고  미싱사들에게 급격히 전파되었다. 그러나 내가 맡은 일은 확실하면서도 남들보다 빠르게 처리했었기에 조장 아가씨를 비롯한

다른 여타 미싱사들 사이에는 일 잘하는 시다로 정평이 났었다. 나는 어느 직장에서 근무하든 내가 맡은 일은 최선을 다했었고 그런 모습이 상사를 비롯한 다른 직원들에게까지 좋은 모습으로 비친 것 같았다.

어느 날, 열심히 일하다가 와이셔츠 단추 몇 개가 떨어지자 같이 일하던

어린 다녀석이 옷을 내게 벗어 달라는 것이다. 자기와 친한 누님에게 가서 떨어진 단추를 꿰매 오겠단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옷을 벗어주었고 내 셔츠를 받아 든 그 아이는 한 미싱사에게 달려가 내 옷을 맡겼다. 단추를 수선한 옷을 내게 건네면서 그 시다아이는 방금 내 단추를 달아주었던 미싱사를 가리키며 저 누나 어떠냐고 내게 물었는데 얼핏 보니 그 여자는 내 첫 애인과 많이 닮은 듯하였다. 나와 친했던 그 시다아이는 그녀가 나를 좋아한다고 내게 귀띔을 해 주었다. 그녀를 보자 호감이 생겼지만 이렇다 저렇다 말은 하지 않고 언제 내가 직접 그녀에게 말을 걸어서 데이트 신청을 할 생각이었다.

그랬었는데 이런... 이 회사도 갑자기 부도가 나는 것이다. 멀쩡하게 돌아갔던 회사가 하루아침에 망한다는 사실을 그때 또다시 겪게 되었는데 80년대 초의 대한민국은 이렇듯 순식간에 부도가 나서 문을 닫게 되는 회사가 한 둘이 아니었다.
그렇게 또다시 나는 실업자가 되었고 나에게 호감을 가졌던 여자와의 연애는 시작도 못해보고 끝이 나고 말았다. 내 인생 또한 언제 부도가 날지도 모르는 위태로운 삶을 살고 있었는데 23살 청년의 꿈은 연일 계속되는 대학생들의 시위와 매캐한 최루탄 연기 속에 호흡기 장애를 겪으며 기침과 재채기를 하고 있었다.

또 한 해가 지나서 24살이 되었지만 역시 마땅한 직장을 구해지 못했던 나와 막냇동생은 둘째 형님이 하시던 구두 일을 배우기로 하였다.
형님은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오랫동안 했던 일이기에 능숙한 기술자이지만 초보였던 나는 모든 게 생소했다. 가죽을 가위로 오리고 스키라는 기계로 깎아서 본드칠을 하고 망치로 두들겨 접고 미싱으로 박음질하는 과정을 거쳐서 구두 윗면을 만드는 작업을 하는데 이것을 일명 "갑피"라 하고 그 일을 하는 사람을 가리켜 갑피 사라고 한다.

구두 일은 크게 갑피와 바닥 두 분야로 나뉘는데 갑피 사는 구두의 윗부분을 담당하고 바닥 사는 그 갑피에 밑바닥 창과 굽을 붙여서 구두를 완성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다. 구두를 만드는 사람들을 가리켜 일각에서는 그 들을 일명 "족쟁이"라고도 부르면서 하대를 하는데 족집게 같은 연장을 사용하면서 일을 하기에 그렇게 불렸고 일의 특성상 사회에서는 거의 밑바닥 직업에 속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막냇동생은 스스로 족쟁이가 아닌

"패션디자이너"라 부르면서 한 동안 둘째 형님 밑에서 열심히 구두 일을 배웠다. 그러나 형제끼리 같은 일을 한다는 게 결코 쉽지 않았다.


형님의 독단적인 성격과 일이 없을 때는 놀고, 바쁠 때는 밤을 꼬박 새우는 철야작업이 반복되다 보니 몸과 마음은 온갖 스트레스로 몸살을 앓게 되면서 동생은 중간에 그만두고 미용학원에 다녀서 자격증을 득한 후 미용사로 직업을 바꾸었다. 나 또한 26살이 되던 해에 형님 밑을 나와서 제화 전문회사에 취업을 했다. 80년대 초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제화기업은

"에스콰이어"와 "금강제화"라는 두 회사가 쌍벽을 이루며 경쟁했다. 나는 그중에서 에스콰이어 계열사인"영에이지"란 캐주얼화를 만드는 회사에 입사를 하게 되었는데 제화회사 중에서는 대기업이었기에 면접은 좀 까다롭게 진행이 되었지만 나는 입사에 성공을 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지만 입사 첫날부터 문제가 생겼다. 나는 미싱사로 지원해서 입사했는데 테스트를 받아 본 결과 미싱사로선 부적격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미싱사 테스트에서 떨어졌으니 내가 일할 곳이 없었다.
고심을 하던 회사 과장은 나를 여자들만 일하고 있던 스카이빙 라인에서 일할 것을 지시했었고 이것은 회사를 스스로 그만두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사내 녀석이 어떻게 여자들만 있는 곳에서 일할 수 있겠냐는 과장의 생각이었지만 예상과는 달리 나는 그 많은 여자들 속에서도  꿋꿋하게 일하였다. 스카이빙 라인은 앞서 언급한 구두를 만들기 위한 가죽을 얇게 깎는 스키라는 기계를 다루는 부서로서 열명이 훨씬 넘는 20대 여공들이 회사 유니폼을 입고 검정 앞치마를 두르고 머리에는 스카프를 쓰고는 앞에서부터 일렬종대로 앉아 각기 자기가 맡은 가죽 부품들을 열심히 기계로 깎고 있었다.

나는 여자들 중간 자리에 앉아서 그녀들처럼 앞치마를 두르고 일을 하게 되었는데 여자들처럼 스카프는 쓰지 않았지만 이건 정말 창피한 일 아닌가? 여자들만 전문적으로 하는 일에 사내 녀석 하나가 그 사이에 끼여서 여자들처럼 일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덕분에 나는 여자들 사이에서는 유일한 청일점이었다. 나는 여자들에게 "꽃 밭의 나비"로 불리기를 바랐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만의 착각이았다. 내 앞에서 일을 하고 있던 동생뻘 되는 아가씨는 나를 "꽃 밭의 잡초"라 부르며 잡초는 뽑아버려야 한다고 조롱하였다.
나는 그런 조롱을 받으면서도 여자들 속에서 열심히 일을 하였고 같은 부서에 있는 팀원 아가씨들과도 별문제 없이 잘 지내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들 많은 곳에서도 잘 어울리며 일할 수 있지만 남자는 여자 많은 곳에서는 주눅이 들어서
잘 견디지 못하는데 나는 그런 일반적인 사회적 편견을 유감없이 깨면서 일을 하고 있었다.
이곳 스카이빙라인의 조장은 예쁘장하게 생긴 충청도 아가씨였는데 충청도 하면 왠지 모르게 성격이 느긋하면서도 온순한 사람들처럼 인식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방적인 나의 편견이었다. 그 이쁘장한 조장 아가씨 입에서 걸핏하면 야이!~개 같은 뇬들아!~하고 쌍욕이 쏟아지는지 처음에는 무척 당황했었지만
일을 하다 보니 그렇게 사납지 않으면 팀원들이 말을 잘 듣지 않는 터라 어쩔 수 없는 조장 아가씨의 대처 방법이었다. 그래도 평상시에는 그녀도 팀원들과 하하 호호 농담도 하면서 잘 어울렸다.

물론, 팀에서 하나뿐인 남자였던 내게도 잘 대해주는 편이라 스카이빙라인에서 일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지금이야 주 5일제 근무가 일반적이 되었지만 80년대 초, 대한민국은 대기업일지라도 주 6일제 근무가 보편적이었기에
가끔, 토요일 오후 퇴근 후, 팀원들끼리 회식을 하였고 그때는 회사 앞 중국집 큰 방을 빌려서 같이 저녁식사를 하였다. 식사가 끝나고 자연스레 소주 몇 병과 안주용으로 군만두가 들어오면 소주잔에 술을 채워서 함께 건배를 하였다. 술을 잘 마시지 못했던 나로서는 이런 회식자리가 여간 고역이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나도 팀원들과 함께
조장 아가씨의 지시에 따라 잔을 높이 치켜들고 건배를 외치면서  원 샷을 하였다.

그렇게 몇 잔의 소주를 들이켜자 모두의 얼굴은 벌겋게 홍당무가 되어갔고 취기가 오르면

조장 아가씨는 주인에게 부탁해서 음악을 틀어달라고 하였다. 방 안 스피커에서 그 당시 히트곡 마이클 잭슨의 "비릿"과 "빌리진" 디스코의 여왕 도나서머의 "핫 스탑"이 울려 퍼지면
모두들 약속이나 한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었다. 물론, 방안에 무대가 설치돼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상체만 흔들어대는 춤이었기에 움직임의 제약을 받을 수 밖에는 없었지만 취기가 한 껏 오른 20대 처녀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춤 실력을 마음껏 뽐냈다.
나 또한 여자들 틈에 섞여서 상체를 흔들어댔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춤을 전혀 배우지 못했던 나는 마치 마네킹이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는 형상으로 춤을 추었었고 누가 볼 때는 거의 오두방정을 떠는 수준이었다. 그렇게 나의 26살 청춘의 동공은 중국집 디스코 사운드 속에서 여자들 속에 파묻혀 흐느적거리며 허공을 헤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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