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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동인 Nov 05. 2024

결혼? 쉬운 줄 알았더니 머나먼 길이었다 15화

이화는 20대의 나의 마지막 카이로스였다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제우스의 아들인 기회의 신 "카이로스"는 덥수룩한 수염과 이마에 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지만 뒤통수는 대머리인 우스꽝스럽게 생긴 신이다. 길게 나 있는 카이로스의 앞머리는 쉽게 잡을 수 있어도 뒤는 미끄러운 대머리라서 뒷 통수는 절대로 잡을 수 없다.

누군가 그에게 물었다.

너는 누구인가?
나는 시간을 지배하는 기회의 신 카이로스다.

머리카락은 왜 이마 앞에만 길게 나있지?
나를 마주치는 사람이 붙잡기 쉽게 하려고.

뒤통수는 왜 대머리인가?

내가 지나가고 나면 다시는 붙잡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뒤꿈치에는 왜 날개가 달려 있는가?
나를 놓친 사람에게서 쏜살같이 달아나기 위해서다.

이화와 어색하게 헤어졌지만 토요일 밤의 여운이 진하게 남아있어서인지 다음날 일요일은 이화와 만날 약속은 하지 않았다. 일요일 하루동안 쉬면서 이화와 앞으로 어떻게 해 나갈 것인지 청사진을 그리느라 골몰하고 있었고 다음에 이화를 만나면 그녀에게 장미꽃 한 다발을 들고 정식으로

프러포즈를 할 계획이었다. 아마도 이화는 내 청혼을 흔쾌히 받아줄 것이다. 이화와의 관계가 급 진전 된 마당에 그녀가 나의 청혼을 거절할 이유가 없다. 이화와 결혼을 약속한 사이가 되면 그때부터는 우리 두 사람은 더욱더 깊은 사랑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당장 이화와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물론, 80년 초 대한민국 사회는 결혼을 일찍 하는 분위기였지만 이화는 이제 겨우 20살이고 나 또한 22살 밖에 되지 않았으니 2~3년 동안 연애하다가 결혼 자금을 좀 모아서 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일요일 하루동안 나는 엠파이어 빌딩을 수 없이 지었다가 허물곤 하였다. 월요일 아침 회사에 출근해 보니 이화는 보이지 않았다.

순간, 당황되었다. 집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아님 갑자기 어디가 아픈 건가? 나의 머릿속은 이화에 대한 온갖 걱정과 궁금증으로 머릿속이 가득했지만 이화의 연락처를 알아 놓지 않았으니 그녀에게 연락할 방법도 없었다.

지금처럼 그 흔한 핸드폰이 있던 시절도 아니었고 유선전화기조차 있는 가정도 드물었지만 이화와 나는 회사에서 매일 보는 사이었기에 따로 연락처를 물어보지도 않았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이화는 회사에 출근하지 않았다.
이화가 회사에 나오지 않자 동료들은 나에게 그녀가 왜 출근하지 않느냐고 물어왔지만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나 또한 답답하긴 마찬가지였으니까.
회사 사장님 말로는 이화가 몸이 좀 아프다고 연락이 왔었다고 하는데 토요일까지 건강했었던 그녀가 갑자기 몸이 아파서 회사에 출근을 할 수 없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혹시, 토요일 그 일 때문에 이화가 충격을 받아서 몸이 아픈 게 아닌가 염려스러웠지만 그럴리는 없었다. 그때 우리들의 사랑행위는 연인사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화가 출근하지 않는 분명한 이유를 알 수 없었으니 내 마음은 궁금증과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설상가상으로 회사가 부도까지 나는 사태가  발생했다. 전 회사 상무님이 우리 회사를 노기등등한 얼굴로 다짜고짜 쳐들어와서는 자신을 배신한 과장님과 실장님을 향해 온갖 험담을 퍼붓더니만 회사를 반드시 망하게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갔었다. 그리고 꼭 한 달 후에 회사가 파산을 하고 만 것이다.

그동안 자금력이 부족해서 회사 사장님이 이리저리 급채를 끌어 쓰다시피 했었는데 전 회사의 덤핑수출로 인해 판로가 막혀버렸으니 더 이상 견딜 재간이 없었다. 그렇게 실업자가 된 회사 동료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이화와는 소식이 끊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미리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았겠지만 회사에서 매일 보았으니 특별히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었는데 회사의 갑작스러운 부도로 인해 이화와 만날 수가 없어진 것이다.

그녀가 사막에 떠 있었던 신기루처럼  내 앞에서 사라지자 나는 한 동안 공황상태에 빠졌다.
마치 내가 한 여름밤의 꿈을 꾼 후 깨어난 것 만 같았는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내가 실업자가 된 지 얼마 후, 형님들과 동생도 모두 실업자가 되었다.
행복은 혼자서 오지만 불행은 친구들을 데리고 온다 했던가... 사랑하는 여자와도 갑자기 연락이 끊기고, 다니던 회사는 부도가 나고, 형님들과 동생마저 실업자고 되고 말았다. 지금이야 2~30대들이 취업할 수 있는 직장들이 널려있지만 그 시절 대한민국에서는 한번 실업자가 되면

마땅히 일 할 수 있는 직장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기에 나는 그저 의미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즈음, 어머님의 강요로 성당이란 곳을 다니게 되었는데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철저한 무신론 자였었기에 성당이든, 교회든 아무런 관심도 없었지만 신앙심이 돈독하셨던 어머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니게 되었고 청년이라는 이유만으로 봉사단체인 청년레지오라는 곳에 가입을 했었다. 청년레지오는 내 또래의 대학생들과 직장인들로 이루어진 단체였다. 남자들보다는 여자들이 더 많았는데 성당 여자들

이라고 해서 모두가 믿음으로 가득 찬 경건한 여자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성격이 무척 와일드한 여자도 있었고 특히 젬마라는 세례명을 갖고 있는 여자는 내게 수시로 장난을 걸어서 나를 아주 곤혹스럽게 만들곤 하였다. 젬마라는 그 여성 눈에 나는 아주 만만하게 보였던 것 같았다. 나는 그때까지도 젬마 같이 와일드한 여자는 겪어본 적도 없었기에 이런 여자가 내게 장난을 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덩치까지 큰 여자는 관심도 없어서 그저 젬마를 피해 다니곤 하였다.

 어느 날은 회합실에서 내가 딴생각을 하며 멍청히 서 있던 중, 갑자기 내 몸이 어떤 충격으로 인해
하늘로 붕!~떠오르더니 구석에 처박혔다. 순식간 일이라서 나는 한 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젬마가 멍청하게 서있었던 나를 자기 히프로 퉁!~하고 튕겼는데 몸무게가 새털처럼 가벼웠던 나는 대책 없이 날아가서 회합실 구석으로 처 박혔던 것이다. 여자 히프에 튕겨서 날아가 보았는가? 얼마나 쪽 팔리는지 나는 단원들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조차 없었는데 그것을 본 다른 여자단원들이 박장대소를 하며 둘이 너무 잘 맞으니까 잘 사귀어보라는 응원까지 하였지만 난 정말 이 여자가 싫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젬마는 내가 세 들어 살고 있었던 주인집으로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해대면서 성당 봉사활동을 핑계로 나를 불러내곤 하였다. 어쩔 수 없이 나가보면 그녀는 내게 화장실 청소 같은 지저분한 일들을 시키고 자기는 새로운 신자들 서류 작성 같은 우아한 일만 하는 것이다.
신참들은 원래 그런 일들을 하는 거라면서 말이다. 아니? 여기가 무슨 군대냐? 지는 선임이고 난 쫄다구게? 속에서 부아가 치밀어 올라왔어도 한 덩치인 그녀가 무서워서 시키는 대로 하였다. 성당이고 뭐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그러면 또 어머님의 성화에 시달릴 것 같아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서 할 일 없이 낮 잠을 자고 있었는데 이번에도 어김없이 여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한 여자가 밝은 목소리로 자기가 누군지 아느냐 물었고 시간이 있으면 만나자는 것이다.

나는 이화가 내게 전화를 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기에  그 여자를 젬마로 착각했었다.
밝은 목소리로 자기가 누군지 아느냐고 물어오는 여자에게 퉁명스럽게 누구시냐고 물었다. 젬마는 내게 전화를 걸어오면 항상 형제님!~저 누군지 아시죠?라고 말했었기에 나는 그럴 때마다 그녀가 누군지 잘 알면서도 귀찮아서 잘 모르겠는데요?누구냐고 되물으며 투덜거렸기 때문이었다. 자기를 모르겠냐면서 상대편 여자는 매우 실망스러운 목소리였지만 나는 잠결에 전화를 받아서인지 목소리조차도 구별을 할 수가 없었다.

이화와 나는 서로의 연락처는 몰랐었는데 어떻게 그녀가 내 연락처를 알고 전화했는지는 지금도 미스테리다.이화와 마지막 만남이 후, 몇 개월이 지나서 그녀가 밝은 목소리로 내게 다시 연락을 한 것은 그동안 나를 만날 수 없었던 일들이 해결되어서 기쁜 마음으로 전화를 했을 텐데 정작 이화의 전화를 받았던 나는 당신을 모른다고 하였으니 이화는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까... 이화는 자기를 정말 모르겠냐면서 몇 번 더 내게 물었지만 나는 그때까지도 젬마란 여자로 착각하고는 나 젬마인데요!~라고 그녀가 말할 때까지 모르겠다는 말만 반복하고 말았다. 그렇게 나의 형광등형 머리는 이화가 내게 다시 전화를 했을 때 전구처럼 즉시 그녀의 목소리를 알아채지 못하고 형광등처럼 몇 번이나 깜박거리고 말았다.불과 몇 개월 만에 자신의 목소리조차 잊어버린 남자가 너무도 실망스러웠던 이화는 이름을 말하지 않은 채 힘없는 목소리로 안녕히 계시라 전화를 끊었다. 그녀가 전화를 끊은 후에야 뒤늦게 이화였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배는 떠난 후였고 그것이 이화를 붙잡을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다.


전화의 주인공이 이화였다고 알았을 때는 이미 "카이로스"가 내 앞을 스쳐 지나간 후였다. 내가 급히 의 뒷 통수를 잡으려 했지만 미끄러운  대머리를 잡는 것은 불가능했다. 순식간에 "카이로스"와 함께 이화가 허공으로 멀리 날아가 버린 후 나는 한 동안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었다. 사람이 순간적으로 달리면 시속 40km의 속도를 낼 수 있다고 하는데 나란 인간은 그 속도로 냅다 달려서 전봇대를 헤딩하고 세상과 하직했어야 마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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