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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동인 Oct 29. 2024

결혼? 쉬운 줄 알았더니 머나먼 길이었다 14화

나는 형광등형 인간이었다

나는 아직 이화에게 사랑고백 조차 하지 못했고 결혼약속도 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결혼을 약속한 애인 같은 행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때 이화와 그런 사랑놀음을 할 것이란 계획은 전혀 없었다. 둘이 손 잡고 걷다가 공원이 있길래 잠시 벤치에 앉아서 쉬었다 갈 생각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건너편 벤치에 있었던 커플의 애정행위를 보고는 나도 모르게 이화의 입술을 훔친 게 발단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나와 이화는 휘발유에 작은 불씨를 던진 것처럼 폭발하듯 타 올랐다. 한번 뜨겁게 달아오른 20살 여자의 몸은 마치 용광로와 같아서 차가운 이성의 물로는 쉽게 꺼지지 않는다.

용광로처럼 한 껏 달아올랐던 두 남녀의 몸은 이미 브레이크가 파열된 고장 난 자동차였고 그렇게 시작된 사랑의 행위는 걷잡을 수 없이 깊은 욕망의 늪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성이 빠져나오려고 몸부림 칠 수록 감성은 더욱더 두 사람을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곳으로 끌고 내려갈 뿐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화가 자기 몸을 쉽게 허락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나의 손길을 전혀 거부하지 않고 이화가 온전히 받아들인 것은 뜻 밖이었다. 이화가 거부를 하면 그냥 입맞춤 정도만 하려고 했었는데 아무런 저항이 없자 이화에게 더 농도 깊은 행위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왜 이화가 그때 공원에서 나를 온전히 받아주었을까... 지금 생각해 보아도 그것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이화로 인해 나는 여러 종류의 여자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무나 완벽해서 접근하기 조차 어려울 것 같았던 여자도 의외로 쉽게 넘어오는 경우가 있고, 반대로 전에 대시하자마자 불과  몇 시간 만에 축구공 차듯이 냅다 나를 차버렸던 E 양 같은 여자는 아무 남자나 대시해도 될 것 같은 여자였다.
외모로 보나 성격으로 보나 아주 쉬운 여자로 보였었지만 실상은 남자를 보는 눈이 매우 높은 여자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화가 쉬운 여자는 결코 아니었다. 그녀가 내 여자가 되었던 것은 운명의 여신이 그렇게 엮어 놓았기 때문이었지 내 노력이나 외모로 이화와 연인이 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화는 나의 인생 노트에서 만나게 될 인연으로 적혀 있었다. 그랬었기에 5천만 인구 중 절반이 여자인 대한민국에서 그녀를 연인으로 만나게 된 것 아니겠는가. 남자와 여자는 인연의 고리가 연결되어야 비로소 만나게 되는 것이지 노력만 가지고는 인연이 되지 않는다. 만날 인연이라면 지구 반대편에 있다 할지라도 언젠가는 만나겠지만 그럴 인연이 아니라면 서로 매일 보는
사이라 할지라도 연인이 되는 일은 결코 없다.
무슨 길바닥 철학자 같은 소리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세상사가 자기 의지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살다 보면 깨닫게 될 것이다.

이화와 내가 한창 욕정의

호르몬인"페닐에틸아민"의 늪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었을 때 정신을 먼저 차린 쪽은 아이러니하게도 나였다. 어두컴컴했지만 사방이 개방된 공원에서 언제까지 이화와 사랑행위를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 동안 서로를 말없이 쳐다보면서 뜨겁게 달구어진 몸들을 식혔다.
조금 전까지 우리들이 한 사랑행위는 깊은 관계를 맺기 전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시작을 했으면 끝을 맺었어야 했는데 아쉽게도 우리들은 종점에 도착하지 못하고 고장이 나서 중간에 멈추어버린 열차와 같은 기분이 되고 말았다.

여자의 몸을 한 껏 달구어 놓았음에도 나는 그때 이화와 만리장성을 쌓을 수는 없었다. 이화와 나는 이제 완전한 성인이 되었으니 서로를 책임질 수 있는 나이었지만 내 주머니 속에는

집에 돌아갈 버스비 정도밖에 없었고 그 시절에는 카드가 대중화되기 전이어서 지금처럼 그 흔한 카드조차도 없었다. 이화와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나는 처음부터 완벽하게 준비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은 항상 내 계획대로 되지는 않았다.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내가 가만히 있자 잠시 후, 이화도 정신을 차렸고 그렇게 두 사람은 어색한 눈길을 주고받았다.
폭풍이 휘몰아치는 바다에서 소용돌이 속에 빨려 들어가 정신을 잃은 뒤, 낯선 무인도 백사장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공허함이 밀려왔다. 시작은 창대했지만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한 속 빈 강정 같은 허무한 여운이 밤안개처럼 두 사람 사이를 감 싸고 있었다. 나의 최대 단점은 임기응변이 무척 약하다는 것인데 그때까지만 하여도 나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었다. 왜냐하면 나는 형광등형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형광등형 인간... 돌발적인 상황에 처하면 대처가 매우 늦다는 것이다.

반면 전구형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대처능력이 전광석화처럼 뛰어나다. 여자와의 관계도 나 같은 형광등형 인간은 전구형 인간에 비해 무척 불리하다.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하면 버벅거리느라 그 좋은 타이밍을 놓쳐버리기 일쑤다. 나의 첫 애인이었던 S 양도 그 타이밍을 놓쳐버리는 바람에 추억 속의 여인이 되고 말았으면 똑같은 실수를 두 번 다시 하면 안 되었지만 아쉽게도 나는 형광등형 인간이다. 기회를 놓치고 난 뒤에야 그것이 두 번 다시 나에게 오지 않는 기회였다는 것을 깨달으니 말이다. 정신을 차린 이화는 흐트러진 옷매무시를 고치고는 말없이 앉아 있었다.

나는 그런 이화를 살며시 다시 안아서 사랑한다고 말했어야 했었다. 그리고는 방금 우리들 사이에 일어났던 사랑행위에 대해 그녀에게 영원히 변치 않을 믿음을 심어주었어야 했었다. 그러나 나는 이화에게 아무런 AS적인 말과 행동을 하지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내가 왜 그렇게 바보 같은 행동을 했었는지 모르겠다.
고등학교 시절, 국어선생님의 예언대로 결혼을 일찍 할 수 있었던 기회가 한 번도 아닌 두 번씩이나 내 앞에 있었는데도 말이다. 지금 와서 그때 일을 추억하면 내 얼마 남지도 않은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다 뽑고 싶을 뿐이다

집으로 돌아갈 막차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우리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화와 공원에서 나설 때의 분위기는 들어오기 전과는 사뭇 달랐다.
왠지 모르게 서먹서먹하고 어색한 기분이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유리막처럼 가로놓여 있었다.

거창하게 시작을 했지만 끝을 마무리 짓지 못한 소설 속의 주인공들처럼 그 어떤 결말도 내지 못한 두 사람의 영혼들은 어두운 밤 길을 헤매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서로 아무 말 없이 공원을 빠져나와 버스 정류장 앞에 섰는데 공교롭게도 이화 집으로 가는 버스가 빨리 오는 바람에 우리 두 사람은 어색한 눈인사를 하고는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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