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쉬운 줄 알았더니 머나먼 길이었다 17화
나는 개밥의 도토리였다
여자들이 많은 직장에서 일을 해도 유독 내 눈에 띄는 아가씨가 있게 마련이다. 여자들만 있는 스카이빙 라인에서도 앞에서 두 번째로 앉아 일하고 있는 J 라는 여성에게 호감이 생겼고
그녀는 동그란 얼굴에 긴 생머리를 어깨너머로 늘어뜨리고 호남 말씨를 쓰는 얌전한 아가씨였다.
왜 내가 그녀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는데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겠는가? 이유 없다 그냥 내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나만 좋아하면서 짝사랑만 하면 무슨 소용?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이 연애는 서로가 필이 통해야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그러나 여자들만 있는 곳에서 그녀에게
접근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냥 같이 일하는 동료로 지내는 것은 별 문제없겠지만 내가 이성의 감정을 갖고 J에게 접근한다면 동료들의 눈에 쉽게 띄기 마련이고 여자들 입방아에 오르내려 보았자 좋을게 전혀 없기 때문이다. 고심을 하다가 퇴근 후, 그녀 뒤를 쫓아가기로 하였다. 지금으로 말하면 스토킹인 셈이지만 그 당시에는 스토킹이란 용어 자체도 없던 시절이었고 남자가 여자를 쫓아다니는 것은 당연한 공감대가 형성되었던지라 사회적으론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퇴근 후, 나는 J 뒤를 멀찍이서 쫓아가다가 그녀가 버스에 오르자 나도 같이 따라 탔다.그리곤 J 모르게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았다.
막상 여자 뒤를 쫓아왔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계획이 전혀 없었던 내 머릿속은 텅
비었었고 나의 심장은 긴장으로 인해 또다시 콩닥콩닥 요동을 쳤다. 그동안 몇 명의 여자와 만나고 헤어졌어도 새로운 만남은 여전히 떨리는 심장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남자가 한번 마음을 먹고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잘라야 한다는 심정으로 실행에 옮겼지만 잠시 후에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는 전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서로의 마음이 통해서 J와 잘 될지... 아님 왜 자기를 쫓아다니냐고 핀잔을 받게 될지... 그렇게 버스를 타고 회사가 있는 성남 시내를 벗어나 20여분 정도 달린 후, J가 사는 동네에서 버스는 멈추었다.
버스 정류장 주위는 허름한 시골 동네였다. 겨울철이라 날은 일찍 저물었어도 가로등조차 별로 켜 있지 않은 길을 J는 집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나는 10미터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녀를 따라 걸었다. J는 내가 자신을 쫓아오고 있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는 듯 콧노래를 부르며 걷고 있었는데 만약 남자가 따라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얼마나 놀랄까?
남자가 여자를 쫓아다니는 것을 용인해 주었던 시절이었지만 여자의 입장에서 볼 때 어두운 길을 남자가 따라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때 어떤 기분이었을지 남자인 내가 생각해 보아도 좋지는 않을 것이다.
J를 쫓아가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그냥 발길을 돌릴까도 생각했었지만 이 역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여기까지 따라왔는데 중간에서 포기하고 돌아간다는 것 자체가 너무 우습지 않은가? 그럴 거라면 애초부터 여자를 쫓아오지 말았어야 했다. 가는 길목에 마침 김을 모락모락 피우고 있는 찐빵 가게 하나가 눈에 띄었다.
안에는 테이블 두 개 정도가 있었는데 다방도 없는 동네인지라 J와 이야기할 곳은 찐빵집이 유일했었다. 나는 이곳을 미팅 장소로 잡고 J가 집에 다다르기 전에 그녀를 불러 세워야 했지만 입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마른침을 삼키고 심 호흡을 몇 번 한 뒤에야 J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는데 이렇듯 여자에게 대시하는 것은 많은 긴장과 큰 용기와 떨림의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그것이 싫다면 감나무 밑에 누워서 감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다가 평생 연애 한번 못하고 총각 귀신이 될 수밖에 없겠지. 내가 J의 뒤에서 이름을 부르자 소스라치게 놀란 듯 그녀가 걸음을 멈춘 뒤 한 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나는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고 여자에게 말한 후, 가까운 빵집에 가서 이야기 좀 나누자고 하자 J는 아무 말없이 순순히 내 뒤를 따라 빵집으로 향했다.
허름한 시골 빵집에 앉아 우리는 찐만두를 주문한 뒤 한 동안 말 없이 앉아 있었고 J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바닥만 응시하고 있었다. 이런 어색한 분위기 속에 나 또한 여자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즈음
우리들이 주문한 만두가 나오자 나는 J에게 나무젓가락을 건네주었고 그녀는 내가 건네준 젓가락을 수줍게 받았다.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은 접시에 만두 한 개씩을 올려놓은 체 꿀 먹은 벙어리 마냥 말도 없이 젓가락으로 만두 속을 헤집었다. 내가 말 주변이 좋았더라면 이런 어색한 분위기를 단 번에 깨뜨릴 수 있었겠지만 나는 여자 앞에서 그렇게 말을 잘하는 편은 못 되었다.
더구나 이렇게 말이 없는 얌전한 여자 앞에서 나의 입은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졌지만 나는 그런 입을 힘겹게 들어 올려 먼저 말을 하였다. J 씨... 내가 쫓아와서 많이 놀라셨죠? 나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면서 무표정하면서도 호남 특유의 억양으로 말하였다.
아저씨... 왜 저를 쫓아오셨다요?
그녀의 말투에서는 나에 대한 그 어떠한 호감도 찾아볼 수 없는 메마른 사막처럼 느껴졌다.
아... 예... 전 그저 J 씨와 좀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요...
J의 질문에 나는 그만 순간적으로 얼떨리우스가 되어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을 하고 말았다.
옴마? 아저씨와 저는 회사에서 매일 보는데 특별히 더 친하게 지낼 필요가 있다요...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리며 나를 보는 여자의 눈 빛은 겨울바람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회사에서 쉬는 시간에 동료들과 밝게 웃으며 떠들었던 J와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여자는
전혀 달랐다.사람이 미래를 예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J를 이렇게 쫓아오지 않아도 될 수 있을 테니까...
혹시... 만나는 애인이 있으신가요?
이런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는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는 게 서로의 대한 시간낭비를 줄일 수 있을 것 같아서 슬쩍 떠 보았는데 J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인이 있었구나... 그래서 내게 이렇듯 쌀쌀하게 대했나? 하는 생각이 미치자 나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빵집에서 그녀와 몇 마디 더 이야기를 해 보았지만 승산이 없는 것 같았다.
여자들은 크게 민들레 형, 갈대 형, 날라리 형, 이렇게 세 분류로 나뉠 수 있다.
1, 민들레 형=이런 여자들은 한번 상대가 정해지면 절대로 남자를 배신하지 않는 그야말로 일편단심형 여자들인데 100을 기준으로 할 때 분포학 적으로 따지면 여성들의 약 20% 정도를 차지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즉~10명 중 2명 정도는 민들레 형이란 뜻이다.
2, 갈대 형=말 그대로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처럼 상황과 여건에 따라 마음이 수시로 바뀌는 형을 말하는데 약 60%의 여성들이 이런 갈대형이라 보면 될 것이다.
갈대형 여자들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느냐에 따라 민들레 형처럼 될 수도 있고 아님 최악인 날라리 형이 될 수도 있다.
3, 날라리 형=남자들이 절대로 기피해야 하는 최악의 여성이다. 이런 여성들은 남자를 자신의 허영심을 채워주는 도구로만 여길 뿐이다. 진솔한 마음은 어디에도 없지만 권모술수가 워낙 좋고 변신을 잘하기 때문에 순진한 남성들이 걸려드는 경우가 많다. 다행히도 날라리 형 여자들은 조금만 주의 깊게 관찰하면 가려낼 수 있겠지만 "민들레와 갈대 형"여자들은 구분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주관적인 판단이니 맹신할 필요는 없고 그저 여자를 만나는데 참고하기 바람. 많은 여자들 중에서 하필이면 애인이 있는 여자를 좋아해서 쫓아왔던 내가 참으로 한심스러웠다. 그러나 여자에게 대시를 하기 전까지 애인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 수가 있겠는가? 내가 사람의 속 마음까지 알 수 있는 부처의 천리안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닌데.
애인이 없는 여자도 대시가 힘들지만 있는 여자를 쫓아다니는 것은 몇 배의 에너지가 더 들기 마련이다. 더구나 J는 여러 가지 상황으로 봐서는 "민들레 형"여자로 느껴졌다.
애인이 있는 이런 "민들레 형"여자에게 대시하는 것은 한 마디로 시간 낭비일 뿐이다.
절대로 마음을 주지 않기 때문이지.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갈대 형"여자들은 설령 만나는 남자가 있다 하더라도 이렇게 무 자르듯 단호하게 거절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민정과는 없던 일로 하고 헤어졌지만 다음 날 출근해 보니 J는 팀원들과 하하 호호 떠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뒷 통수가 근지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는데 어제 있었던 일들을 그녀가 동료들에게 마구 떠벌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J가 팀원들에게 내 얘기를 했는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그날따라 나를 바라보는 팀원들의
눈빛은 평소와는 다르게 느껴졌다.
나는 그런 팀원들의 눈 빛을 뒤로하고 내 자리에 앉아 하루 일과를 준비했지만 기분은 그렇게 좋지 않았다. 당연하지 않겠는가? 어제 있었던 J와의 만남이 일방적인 나의 헛 발질로 끝났으니 말이다.
곧 오전 일과가 시작되었고 나는 여느 때처럼 내게 맡겨진 일을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마침 높은 사람(상무)이 생산부 과장과 함께 작업장을 둘러보았다. 팀원들 모두 같은 유니폼에 앞치마를 두르고 머리에 스카프를 쓰고 있었지만 유독 한 사람만 머리에 스카프를 쓰고 있지 않아서 상무가 이상하게 쳐다보던 중 남자인 나를 발견한 것이다.
처음에는 그냥 지나치는 듯하다가 뒤돌아서서 유심히 한번 더 보던 상무는 과장에게 따져 물었다.
어이!~이 과장!!~~~ 저기 저!~개밥에 도토리는 뭐야?
왜 여자들만 있는 스카이빙라인에 남자 녀석 하나가 있는가!!~~
상무의 질책을 받은 과장은 우물쭈물 변명을 하였지만 상무는 벼락 같이 화를 내었다.
"개 밥의 도토리"는 당장 다른 곳으로 보내!~~~
상무의 말 한마디에 "꽃밭의 잡초"였던 나는 순식간에 "개 밥의 도토리"가 되어서 이번에는 "준비조"로 좌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