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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동인 Nov 26. 2024

결혼? 쉬운 줄 알았더니 머나먼 길이었다 18화

동생녀석이 내게 폭탄머리를 선사했다

상무에 의해 하루아침에 "준비조"로 좌천되었던 나는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셈이었다.


적어도 이 부서에는 내가 스카이빙 라인에서처럼 "꽃 밭의 잡초"라든가

"개 밥의 도토리"란 소리는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되었고 준비조에는 나를 포함해서 남자들이 세명이나 있었다.회사에는 4개 부서가 있었는데 갑피를 완성하는"미싱반"가죽을 얇게 깎아주는"스카이빙 라인"가죽을 넓게 펼쳐놓고 손 프레스로 부속 모양을 찍어내는"재단반"그리고"미싱반"이 일하는데 준비를 해 주는"준비조"이렇게 4개 부서가 있었다.그중에서 내가 일했던 "스카이빙 라인"부서만 빼고는 모두 남녀가 섞여서 일하고 있었기에 준비조에서  일하는 데는 처음부터 적응하기 위한 어려움은 없었다.

내가 여자들만 일하고 있었던 "스카이빙 라인"에 있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생산과 과장의 장난이었다.생산과 직원들의 인사권을 독점하고 있었던 과장이 미싱 테스트에서 떨어진 나를 장난 삼아 여자들만 있었던"스카이빙 라인"에 보내서 적응력을 시험해 본 것이다.

여자들 속에 던져 버렸으니 며칠 못 버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잘 적응하는 것을 보고는 희한한 녀석이 하나 들어왔네? 하고 그냥 내버려 두었지만 상무의 눈에 내가 그만 딱 걸리고 말았다.하긴, 여자들만 일렬종대로 앉아서 일하고 있는 중간에 남자 녀석이 하나 끼어 있었으니 내가 상무였다 할지라도 모양새가 좋지 않아서 당장 다른 곳으로 보내고 말았겠지.

어쨌건 나는, 상무에 의해 준비조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이곳 조장 역시 나보다 두 살 연하의 아가씨였다.준비조 조장은 내가 먼저 일했던 스카이빙 라인 조장처럼 사납지도 않았고 쌍욕도 절대 하지 않는 얌전한 아가씨였지만 다혈질에다 심성이 좀 여리고 예민한 편이라 과장에게 꾸중을 들으면 곧 잘 울기도 하였다.지금의 직장 분위기는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80년대 초, 군사독재정권이 억누르고 있었던 대한민국 사회는 매우 권위적

이어서 상사는 부하 직원이 잘 못 하면 사정없이 야단을 쳐댔던 시대였다.마음이 여린 조장은 그때마다  준비조로 돼돌아와서는 자신의 자리에 엎드려 울곤 하였는데 지금의 민주화 시대에 살고 있는 2~30대들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우리들은 그렇게 직장생활을 하였다.

중간 관리자인 팀장들은 모두 남자였고 그 밑에 있는 조장들은 대부분 여자들이었다.왜 이런 관리체계가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80년대 초 당시"남존여비" 사상이 남아 있었던 독재정권 시대의 자화상이 아닌가 싶었다.조장들은 팀장의 직속 부하였기에 팀장의 말 한마디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였을 만큼 팀장의 권위는 대단히 높았다.
이젠 해가 넘어서 그때 내 나이 26살, 그 나이 때면 적어도 미싱사로 일하거나 아님 팀장과 같은 관리자가 되어야 했었지만 나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아주 어정쩡한 자리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팀장은  겨우 한 두 살 정도 위였으니 나는 그에게도 상당히 껄끄러운 존재였기에 팀장은
내게 할 말이 있으면 조장을 불러서 따로 지시를 내리곤 하였다.

그러나 조장아가씨 또한 자기보다 두 살이나 더 많은 남자가 껄끄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나 말고 준비조에 있는 두 명의 남자들은 20살 정도였기에 조장은 그들을 마치 동생들 다루듯 하였지만 그들과 달리 자기보다 나이 많은 남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 처음에는 상당히 난처해하였다.나 또한 그런 조장 밑에서 일하기가 불편하였지만 여자들만 있는 스카이빙 라인에서도 꿋꿋하게 버텼었기에 나는 그런 "젖은 낙엽"정신으로 준비조 또한 열심히 적응해 가며 일했다.조장은 미싱도 잘 다루었고 준비조에 한대 밖에 없는 미싱에 앉아서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나는 그녀가 일하는 것을 어깨너머로 보고는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 때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미싱 연습을 하였다.

조장아가씨도 나의 그런 모습을 보고는 좋은 인상이 들었는지 나는 그녀와 곧 친해질 수 있었다.
일렬종대로 앉아서 일했던"스카이빙 라인"과 달리 "준비조"는 서로 마주 보면서 일했었기에 근무시간에도 온갖 잡담을 하며 일할 정도로 사내 분위기는 상당히 자유로웠다.일하면서 너무 시끄러우면 가끔 조장이나 팀장이 조용히 하라고 주의를 주는 정도였다.음악을 좋아했던 나는 집에 있는 녹음기를 갖고 와서 일하는 시간에 틀곤 하였는데 주로 폴모리아악단의 세미클래식이나 골든 팝송들이 녹음기의 작은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권위적인 회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작업 시간에 음악을 듣는 것은 상사들도 뭐라 하지 않았다.음악이 일의 능률을 향상한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노래를 곧 잘 부르던 조장아가씨는 가수 여진의"꿈을 꾼 후에"를 일하면서 작게 즐겨 불렀다.

나는 그대 모습을~꿈속에서 보았네~사랑하는 사람이여~~ 꿈속에서 그댈 봤네~~(중략)
장미꽃 향기를~맡으며~잔잔하게 미소 짓는 그대 얼굴 보았네~~ 살며시~~ 그대를~

80년대 초, 당시 히트곡이었던 여진의 "꿈을 꾼 후에"란 노래는 여진의 청아하고 맑은 음색과 꿈속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동경한다는 가사와 몽환적인 멜로디는 여자들은 물론, 나를 비롯한 많은 남성들의 가슴을 녹아내리게 하였다.
도대체 이 가수가 누군가 하였더니 서울대학교 성악과 출신이면서 중학교 음악교사로 근무했을 때 본인이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였는데 여진은 그 당시엔 보기 드문 실력파 가수였다.
성악과 출신이어서 그런지 여진의 노래는 맑고 고왔다.물론 가수 여진을 절대 따라갈 수는 없었지만 조장의 노래 실력도 매우 좋았는데 음색도 여진을 조금 닮은 듯하였고 그녀가 "꿈을 꾼 후에"를 부르며 일할 때는 기분이 매우 좋다는 것을 의미했다.그렇게 스카이빙 라인에서 "꽃밭의 잡초"로 일하다가 상무에 의해 "개 밥의 도토리"로 쫓겨 나온 준비조의 생활은 의외로 아주 평온하게 흘러갔다.

둘째 형님 밑에서 같이 구두일을 배웠던 막냇동생이 미용학원에 다니겠다고 하자 큰 형님은 길길이 뛰었다.지금이야 남미용사들이 여미용사들보다 더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시대지만 80년대 초, 대한민국 사회에서 남자가 여자들의 전용직인 미용을 배운다는 것은 마치 남자가 여자들처럼 귀걸이, 코걸이를 치렁치렁하고 다니는 것처럼 꼴불견이었다.
남자 녀석이 하고 많은 일들 중에서 여자들의 전용물인 미용을 배우는 것은 가문의 수치라면서  큰 형님은 20살의 막냇동생을 몽둥이로 두들겨 패면서까지 말렸는데 나는 그런 형님에게 매 맞는 동생을 감싸다가 같이 얻어맞곤 하였다.

이게 과연 큰 형님에게 몽둥이로 두들겨 맞을 정도로 잘 못 된 일인가 싶었지만 가부장적 마인드의 큰 형님은 그런 막냇동생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생은 기어이 미용학원을 다니게 되었고 그 녀석에게 내 머리는 아주 좋은 실습대상이었다.
내 나이 26살 때는 머리숱이 너무 많아서 귀찮을 정도였기에 동생은 싫다는 나를 대상으로 온갖 실습을 자행하였다.녀석이 이발소에 갈 필요 없이 공짜로 머리를 잘라주겠다는 제안을 처음엔 싫다고 거절했다가 세련된 머리로 캇트 해주겠다고 하도 집요하게 꼬드기는 바람에 반신반의하면서 맡겼지만 역시나... 녀석이 밸런스를 잘 못 잡는 바람에 조금씩 양쪽 머리를 커트해 가더니만 어느 순간부터는 교도소 죄수 머리 스타일이 되는 것 아닌가?

길었던 내 장발머리는 온데간데없이 나를 이 꼴로 만들어 버린 동생을 원망하며 화를 냈지만
이미 잘려나간 내 머리카락들은 늦가을 바람에 뒹구는 낙엽들처럼 되고 말았다.허전한 머리를 부여잡고 다음 날 아침, 회사로 출근해 보니 나를 본 조장아가씨와 동료들이 이발 시원하게
잘했다고 키득이며 한 마디씩 하는 것이다.
과장도 나를 보더니 어느 이발소에 갔다 왔냐고 허허 웃으며 혀를 끌끌 차면서 지나갔다.
아마도 과장은 머리가 좀 모자란 녀석인지, 아님 정신세계가 안드로메다급인 고문관 하나가 들어왔다고 생각했겠지.그렇게 어제까지도 덥수룩했던 장발에서 갑자기 죄수 머리로 바뀌었으니 내 몰골은 정말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그러나 어찌하리... 동생 녀석의 꼬드김에 넘어간 내가 잘 못이지...

이젠 앞으로 두 번 다시 녀석에게 내 머리 맡기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그저 머리카락이 빨리 자라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는데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 하지 않는가.몇 개월이 지나자 동생 녀석의 만행은 자연스럽게  잊어버렸고 내 머리카락은 원래의 모습대로 돌아왔나 싶더니
동생 녀석이 기다렸다는 듯, 이번에는 최신 유행하는 파마를 해주겠단다.몇 달 전 일을 상기하며 치를 떨었던 나는 일언지하에 거절했지만 또 녀석의 집요한 공작에 말려들었다.
그동안 학원에서 열심히 배웠으니 형을 아주 세련되고 멋진 남자로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동생의 말에 나는 한 마디 하였다.


야 인마!~남자가 무슨 파마를 하냐!!~

내 말에 동생은, 아냐!~ 형!~~ 지금은 남자들도 파마를 많이 한다고!~외국 남자들 좀 봐!~ 모두들 하나 같이 파마를 하잖아!!~~요즘 최 첨단 유행이고 여자들이 아주 좋아한다고!!~


하긴.. .그  당시 I Was Made For Dancing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던"레이프 가렛"이
긴 파마 머리를 하고 내한 공연을 했을 때 여자들이 미쳐 날뛰는 모습을 TV에서 본 적이 있던지라
나를 세련된 남자로 바꾸어 주겠다는 동생 녀석의 유혹에 또 홀라당 넘어가고 말았다.그렇게 시작된 파마가 저녁 8시쯤부터 시작해서 거의 새벽 1시까지 독한 약을 옴팍 뒤집어쓴 채 로또를
말고 있었으니 과연 내 머리가 어떻게 되었겠는가?머리카락이 다 녹아서 흐물흐물하고, 로또에 말리지 않아서 고슴도치 바늘처럼 사방으로 삐쳐 나오고,내가 생각했던 파마가 전혀 아닌 "폭탄 맞은 머리"스타일이 되고 말았다.
거울을 보고 나는 경악을 하며 분노에 찬 눈으로 동생을 째려보았는데 녀석은 별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하였다.

형!~파마는 처음엔 원래 다 그런 거여!~~ 며칠 지나면 아주 멋진 스타일로 될 테니까 안심혀!!~

동생 녀석의 말을 듣고는 반신반의했지만 어쩌겠는가? 그렇다고 이번에는 수도승처럼 머리를 박박 밀수도 없고...다음 날, 그 꼴로 회사에 출근했더니 한 바탕 난리가 났다.나를 본 사람들마다 배꼽을 잡고 웃느라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이다.심지어는 여직원들까지 몰려와서 내 머리를 보고는 폭소를 터뜨리면서 뒤로 넘어갔다.
곧 사무실에서 과장 호출 명령이 떨어졌다.
사무실로 들어온 나를 보고 과장이 근엄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이봐!!~~ 자네!~~ 회사에 무슨 불만 있어?
도대체 불만이 뭐길래 머리를 그 따위로 하고 출근했나!!~~~불만이 뭔지 나한테 말해 봐!!~~

과장은 마치 내가 회사에 불만이 있어서 폭탄 맞은 머리 스타일로 시위를 하는 것처럼 오해를 하는 말투였다.내가 아무 말하지 않고 가만있자 과장은 내게  파마를 당장 풀라고 명령하였다.그렇게 사무실을 나온 뒤, 나는 이걸 어떻게 할지 잠시 고민에 빠졌지만 나는 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머리를 당장 풀라는 과장의 엄명도 듣지 않고 파마를 풀지 않은 채 계속 회사에 출근했다.
과장도 그런 나를 보고 이젠 아예 포기했는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게 되었는데 나는 회사 내 직원들,특히 여자들 사이에서는 안드로메다 성좌에서 온 외계인으로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그렇게 열흘, 보름, 한 달여의 시간이 지나자 동생 녀석이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았던 내 파마머리는 조금씩 자연스럽게 풀어졌고 그때부터 놀라운 반전이 일어났다.어느 날부턴가 파마를 한 남자 직원들이 하나, 둘 생겨나더니 마치 유행처럼 파마가 번지는 것이다.급기야는 파마를 하지 않은 남자들은 유행에 뒤 떨어지는 것처럼 인식되었는지 너도 나도 파마를 하더니만 생머리를 하고 있는 남자들보다 훨씬 더 많아지게 되는 지경까지 되었는데 회사 내에서 외계인 신분이었던 나는 졸지에 회사남자들의 최첨단 유행 파마머리를 이끄는 선두주자로 격상하였다.

파마 머리가 거의 풀어졌을 때의 제 모습입니다 장발스타일에 살짝 파마를 한 것 같은 아주 촌스런 스타일이지만 그나마 이때가 가장 자연스러웠지요 머리숱이 너무 많아서 귀찮을 정도였는데 나중에 뚜껑(가발)을 쓰게 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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