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다 한 이야기 18화

연애는 이상이고 결혼은 현실이다.

by 현동인

"3년 미인"이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이쁜 여자와 연애를 할지라도 3년이 지나면 상대방에 대한 매력이 무뎌지면서 처음 만났을 때의 그 감정들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남녀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면서 급격하게 사랑에 빠지는 원인은 소위 "사랑의 호르몬"이라
불리는 도파민과 페닐에틸아민이 뇌에서 분출된다는 사실을 과학적인 실험으로 이미 밝혀진 결과이다.

그 호르몬들의 유효기간이 보통은 2년에서 길게는 3년이다.3년이 지나면 그때부터는 상대방에 대한 매력이 급감하면서 단점들이 드러나기 때문인데 현대과학으로 밝혀지기 전에 오래전부터 우리 조상들은 그런 원리를 터득하였던 것이다. 나 또한 은영이와 연애를 할 동안에는 하루 종일 여자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었고 회사에서 퇴근하면 매일 그녀를 만나
호프집에서 사랑을 불태우며 결혼까지 약속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우리들은 만나는 동안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멜로드라마였던 "겨울연가"의 주인공들처럼 그렇게 고상한 연애는 하지 못했었다. 같이 손 잡고 여행 한번 제대로 한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맥주를 좋아하는 여자와 만나다 보니 데이트 장소가 주로 호프집 같은 주점이었고 게다가 그 시절에는 데이트

비용은 모두 남자가 부담했었기에 나는 항상 돈에 쪼달렸다.

월급을 받아도 여자와 몇 번 만나다 보면 내 용돈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바닥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처음에 만나서 연애를 할 때는 여자의 모든 점이 좋아 보였지만 시간이 흐르자

은영이의 단점들이 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외동딸이면서 비록 아버지는 안 계셨지만 재산이 많아서 집이 부자였던 그녀는 고생이라곤 해본 적이 없었기에 철딱서니가 없으면서도 돈 씀씀이는 무척이나 헤펐다.

난 이제껏 살면서 단 한 번도 입어보지 못했던 명품옷과 핸드백, 비싼 운동화로 치장을 하면서도
정작 나와 만났을 때는 커피 한번 산 적이 없었고 늦은 밤까지 함께 있다가 헤어질 때는 내가 택시비까지 내주어야 했다. 물론, 부잣집 외동딸이라고 해서 모두 다 그녀 같지는 않을 것이다. 부유하게 자랐던 여자들 중에서는 스스로 집을 나와서 양로원 같은 곳에서 봉사하며 사는 여자들도 있으니 이것은 인성 자체의 문제지 환경 때문은 아닌 것 같았지만 불행히도 내가 만났던 은영이는 그런 여자는 아니었다.

아무리 결혼까지 약속했었지만 과연 내가 이런 여자와 만나서 가정을 이루고 잘 살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아졌다. 게다가 그녀 어머님의 완강한 반대를 극복하고 여자와 결혼까지 하겠다는 용기조차 없었다. 만의 하나 드라마나 영화처럼 여자 어머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에 성공한다고 해서 과연 내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씀씀이가 무척이나 헤픈 여자와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살 수 있을지 강한 의문이 들었다.

연애는 이상이지만 결혼은 현실이기 때문이다.

오랜 고민 끝에 은영이와의 만남은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연애를 해 본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헤어짐이 만남보다 훨씬 더 어렵다는 사실을... 차라리 여자가 나 싫다고 떠나가면 아주 간단하고 쿨 하게 헤어질 수 있겠지만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내가 가난한 남자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여자는 나와 헤어질 마음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아마도 그동안 나와 만나면서 정이 들었던 것 같았다.


정과 사랑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뭔가 좀 다른 느낌이다. 사랑이 모닥불처럼 뜨겁게 활활 타오르는 것이라면 정은 화로에 감추어진 불씨라고나 할까? 사랑처럼 뜨겁지는 않지만 잿 속에 묻혀있는 불씨로 인해 따뜻한 온기가 오래도록 지속되는 게 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남녀의 관계는 이 정 마저 끊어버려야 헤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은영이와 헤어지기로 마음먹었던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차츰 여자와의 만남을 멀리했고 그녀와 만나게 되면 현실적인 이유를 들어서 우리는 결혼이 어렵다는 것을 은연중에 내 비췄다.
눈치 빠른 여자가 그런 나의 의도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 여자는 내가 일하고 있던 직장까지 찾아왔었는데 그날은
내가 34살 때 12월 말쯤이었고 회사에서는 송년회를 하기 위해 무대가 갖추어진 어느 주점을 예약한 상태였다. 말도 없이 갑자기 나를 찾아온 여자를 보고 당황했었지만 회사 동료들은 환호를 내질렀다.


남자들만 일하고 있는 곳에 여자가 찾아왔고 더구나 그날은 송년회 파티를

할 예정이었으니
송년회 분위기가 훨씬 더 좋아질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은영이는 나와 함께 지내기 위해 찾아왔었지만 회사동료들의 환대에 함께 참석하기로하였는데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처했던 나로서는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얼떨결에 은영이와 나는 회사 송년회 파티에 같이 있게 되었는데 이것은 큰 사건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