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다 한 이야기 19화

회사 송년회.

by 현동인

술이 있고 밴드와 무대가 갖추어진 회사 송년회에서 은영이는 그야말로 물 만난 고기였다.

평소에도 술 마시고 노는 것을 좋아했던 여자인데 송년회는 그녀가 좋아했던 모든 요건들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많은 남자들 사이에서 홍일점이었던 그녀는 누구와도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친화력을 발휘했기에 회사 동료들에게 당연히 인기가 폭발했다.

처음 만난 회사동료들과도 스스럼없이 함께 술을 마시며 누가 시키지 않아도 무대에 나가 밴드에 맞춰 노래를 부르면서 섹시하게 춤까지 추자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동료들은 열광을 하며 그녀를 빙 둘러싸고 함께 춤을 추었다. 그 모습을 보고 한때 은영이와 결혼약속까지 하면서 좋아했던 나는 여자에 대해 큰 실망감까지 들곤 하였다.
그녀가 친화력이 좋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아니? 어떻게 처음 만난 남자들과 아무 부담없이 저렇게 놀 수 있단 말인가? 내가 고지식한 남자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자유분방한 여자일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었다. 그때까지도 한창 은영이와 사랑에 빠져 있었다면 그런 모습을 보고는 욱~하고 치밀어 올랐겠지만 그녀로부터 마음을 정리하고 있었기에 그렇게 화도 나지 않았다. 동료들이 와서 같이 춤추며 놀자고 하였지만 그들과 함께 놀 기분이 아니어서 나는 그저 내 자리에 앉아 그들의 노는 모습을 보며 아무 생각 없이 맥주를 조금씩 들이켜고 있었다.

나는 그때 친구형님이 운영하는 금은세공업체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회사에는 상무가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생산직을 맡고 있는 내 친구였고 또 한 명은 매장에서 소위 "나까마"라고 불리는 중간상인들에게 제품들을 파는 영업상무가 있었다. 나 보다 두 살 아래인 영업상무는 곱상한 얼굴에 말투도 여자처럼 나긋나긋했기에 그는 20대 초반에 일치감치 결혼을 해서 아이를 둘이나 키우고 있는 유부남이었다. 영업상무일지라도 내게는 엄연히 상사이지만 그는 나를 보면 항상 형님이라고 불렀다. 내가 사장 동생의 친구여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다른 직원에 비해 내게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뒷백이 이래서 좋은 것 아니겠는가? 무대 음악이 흥겨운 디스코에서 잔잔한 브루스 타임으로 바뀌자 그 영업상무가 내게 와서는 은영이와 함께 브루스를 추어도 되냐고 물었다.

내 여자 친구와 끌어안고 춤을 추어도 되냐고?

상무의 요청을 듣자 한 마디로 기분이 참 더러웠다. 디스코리듬에 몸 흔들며 같이 마주 보고 춤추는 정도야 그냥 넘어갈 수 있겠지만 여자 친구의 허리를 끌어안고 춤추겠다는데 그것을 용인해 주는 남자가? 물론... 있을 수 있겠지만 나의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마음은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다른 직원도 아니고 상무가 내 여자 친구와 춤추고 싶다는데 거절하기도 난감해서 마지못해 허락했지만 내심으론 은영이가 상무의 춤 제안을 거절하기를 바랐었다.

그런데 웬걸? 그녀는 나를 보며 한번 싱긋 미소를 짓더니 상무와 함께 브루스 음악에 맞춰서 둘이 착 달라붙어 춤을 추었다. 빨강 노랑 파랑 조명이 무대를 비추면서 돌아가며 두 남녀가 포개져서 한 몸이 된 그림자와 함께 흐느적거렸다.
은영이와 헤어질 마음을 먹고 있었지만 내 눈앞에서 그런 두 연놈의 춤추는 모습을 보니 내 마음은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송년회를 마치고 여자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은영이는 상무님이 너무 친절하고 자상한 남자라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며 제비처럼 재잘거렸다. 나는 그녀의 말에 별다른 응수를 하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흘려버렸다.
상무는 엄연한 유부남이고 은영이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매일 나에게 전화를 하던 은영이는 차츰 전화 횟수가 뜸해졌지만 이미 나는 여자로부터 마음이 멀어지고 있는 상태였고 그녀 또한 나란 남자를 떠나보내는 과정이라 여었다.

은영이를 다시 만난 것은 송년회 파티를 마치고 그녀를 집에 바래다준 뒤 한 달만이었다.
우리는 여느 때처럼 호프집에서 만나 오랜만에 맥주를 마셨는데 그날따라 여자의 얼굴은 무척 어두워 보였다. 은영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내가 먼저 묻지는 않았는데
말없이 맥주를 마시던 은영이가 먼저 입을 떼었다.

오빠에게 고백할 말이 있어...

내게 고백할 말이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