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다 한 이야기 23화

고집 센 여자를 만날 줄이야..

by 현동인

여자와 선을 보기로 한 장소는 명동성당을 마주 보고 있었던 어느 카페였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서 카페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약속 시간에 맞춰서 카페문을 열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카페 안을 둘러보니까 여자는 이미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창가 자리에 앉아있었다.
나는 미리 여자의 사진을 보았던지라 그녀가 오늘 만나기로 한 여자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나는 그들에게 인사를 하고는 여자와 마주 보고 자리에 앉았는데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앉아 있는 여자를 처음 본 순간, 아!~이 여자 정도면 됐다 하는 마음이 들었다.

여자의 첫인상은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여자와 그녀 어머님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많은 말을 했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내가 그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는다. 아마도 온갖 감언이설들만 주야장천 늘어놓았을 것이다.
여자 옆에서 그녀의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와 딸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얼마 전에 선을 보았었는데 그게 잘 되지 않아서 좀 걱정스럽다는 거였다. 남자에게 자기 딸이 한번 상처를 받았었기에 이번에도 잘 못되면 어쩌나 하는 염려였다. 여자의 어머님을 안심시키기 위해 또 한참을 뭐라고 떠들었지만 역시 그때 무슨 말을 했었는지 기억이 없다. 내가 고장 난 녹음기처럼 떠들어댔어도 여자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아마도 그녀는 내가 어떤 녀석인지 알아보기 위해 경청만 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여자의 모습이 참 청초하게 느껴졌었고 그때의 마음은 이 여자를 꼭 잡고 싶었다. 어쨌든 나의 사탕발림 사기성 멘트가 통했는지 여자와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새로운 여자와의 첫 만남은 뭐랄까...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경치 좋은 여행지로 떠날 때만큼 설렘에 사로잡혔다고 할까?


여자와 첫 데이트는 경복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그때 경복궁은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였다. 우리는 많은 연인들 틈에 끼어서 경복궁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이야기를 하였는데
여자는 나와 처음 선을 보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때는 한마디 말도 없이 다소곳이 앉아서 내 말만 듣고 있었기에 얌전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었지만 뜻 밖에, 여자는 성격이 매우 다혈질이면서 기가 센 여자로 느껴졌다.
어떤 사안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그녀는 자신의 주관적인 사고를 거침없이 내게 말했고
내가 조금이라도 반문을 하려고 하면 자기 말이 맞다고 못을 박아대는 것이다.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첫 만남부터 대판 싸울 것 같아 내가 먼저 입을 꾹 다물었다. 처음 여자와 선을 보았을 때와는 반대로 나는 여자의 말을 듣고만 있어야 했다. 우리가 결혼한 뒤의 청사진도 여자는 자신의 의지를 피력하였는데 앞으로 결혼하게 되면 어떻게 살겠다는 둥, 자기는 결혼해서도 직장을 다니겠다는 둥, 아이는 하나만 낳아서 남부럽지 않게 키우겠다는 둥, 내가 물어보지도 않은 말들을 아주 소신껏 말하였다.

물론, 그때 내 능력상 시키지 않아도 여자가 먼저 맞벌이하겠다고 하면 내겐 고마운 일이지만 별로 달갑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이 여자에게 경제적으로 휘어잡혀 살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고 나는 그 어떤 여자에게도 공처가로 살고 싶지 않았다. 어떡하든 내 경제적 능력을 키워서 가정의 주도권을 내가 행사하고 싶었다. 또한, 딸이건 아들이건 아이들을 최소 셋 정도는 생각하고 있었는데 겨우 달랑 하나만 낳아서 남부럽지 않게 키우겠다니...

물론, 여자와 만났던 90년대 그 당시도 아이 하나 대학까지 보내면서 키우려면 지금보다 훨씬 버거운 환경이었지만 아이들은 서로 엉키면서 싸우고 경쟁하면서 커야 된다는 나의 고전적인 사고방식에는 전혀 맞지 않았다. 더구나, 주관이 강하고 기가 센 여자와 나는 상극이었는데 나 역시 고집이 세고 주관이 강한 남자였던 것이다.
한 마디로 둘 다 주관이 강하면서도 불 같은 다혈질이었고 나는 그녀의 말을 들을 때마다 어? 이건 아닌데... 하는 갈등이 일곤 하였다.

그중에서 가장 최악의 말은 여자가 살아왔던 과정들을 이야기할 때였다.

그녀도 어릴 때는 너무도 가난해서 "광대뼈다귀가 튀어나올 정도로 말랐고, 똥구멍이 찢어질 정도로
못살았다"는 말을 내게 아무렇지 않게 하였다.

"가난해서 광대뼈다귀가 튀어나올 정도로 말랐고 똥구멍이 찢어질 정도로 가난했었다?"

아니... 어쩜 27살 아가씨 입에서 이렇게도 컨츄리스런 말투가 부담 없이 나올 줄이야...
그냥 가난해서 고생을 많이 했다고만 하면 될 것을 이제 처음 만나 데이트하는 남자에게 이런 원초적인 표현을 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여자의 말을 듣고 그녀의 얼굴을 좀 보았더니 정말 여자는 광대뼈가 좀 나온 것 같았다. 예로부터 광대뼈가 나온 여자들은 고집이 엄청 세다고 들어왔는데 그 말이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여자의 얼굴을 다시 본 순간부터 그녀와 처음 선을 보았을 때의 그 청초했던 모습은 빛의 속도로 내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객관적으로만 본다면 여자는 내 형편에 잘 맞는 상대였을 수도 있었다.
나보다 8살이나 연하면서 인물은 은영이보다 한참 떨어졌지만 고생을 하고 자랐으니 생활력도 강하면서 경제관념도 은영이처럼 무개념은 아닐 테고 가진 것 없는 나란 남자에게 어쩜 그녀는 최상의 여자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자의 그 한마디는 그녀가 갖고 있는 모든 장점들을 한방에 날려버렸고 그때부터 이 여자는 아니올시다~라는 관념이 내 머릿속에서 화석처럼 굳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