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다 한 이야기 24화

흘러간 강물은 돌아오지 않는다.

by 현동인

집에 와서 여자와의 첫 데이트 때 그녀가 왜 그렇게 돌변했는지 고민을 해 보았다.


선을 볼 때 말도 없이 참한 요조숙녀 같았던 여자가 돌변한 원인은 바로 나였던 것이다.

지금도 여자와 선을 본 자리에서 그때 내가 무슨 말을 그녀에게 했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도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한 시간도 훨씬 넘게 온갖 허풍들을 늘어놓았던 같았다.


남자란 동물들이 대개 그렇지 않겠는가?


마음에 드는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는 하늘의 달과 별도 다 따다 줄 것 같은 허풍들을 남발한다는 것을. 문제는, 나의 사기성 감언이설들을 듣고는 아!~~ 이 녀석은 앞으로 마음껏 휘어잡고 살아도 되겠구나!~하는 믿음이 들었을 것이다.


여자들은 대개 남자와 만나더라도 얼마동안은 자신의 본모습을 숨기고 좋은 면만 보여주려고 하는 경향이 있기 마련이다.(물론, 남자들도 그렇겠지만)그런데 이놈은 선을 볼 때부터 자기에게 완전히 빠졌으니 잡아놓은 물고기에 먹이는 주지 않는 것처럼 첫 만남부터 자신의 본모습을 유감없이 내게 보여주었다.


만약, 내가 그녀와 사랑에 빠졌다면 여자의 원초적인 말투가 그렇게 거슬리지 않았을지도 모르겠고 그저 표현이 직설적인 순박한 여성쯤으로 좋게 넘어갔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사랑이라는 마약은 모든 신경세포를 마비시키고 오로지 상대방의 좋은 면만 보도록

포커스가 맞춰지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아쉽게도 나는 그녀와 사랑에 빠진 상태는 아니었기에 여자의 직설적인 표현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첫 만남의 설렜던 감정도 급격히 식어버린 상태에서 그녀를 계속 만나야 할지 갈등이 들었다.

여자와 만날 때마다 내 표정은 굳어졌고 당연히 하고 싶은 말도 없었다. 눈치 빠른 여자는 그런 나를 보고 남자가 너무 패기가 없다는 둥, 앞으로의 비전도 보이지 않는다는 둥, 같은 내가 듣기 거북한 핀잔만 늘어놓았고 나는 그녀와 함께 있는 자리가 너무 거북해서 숨이 막힐 정도였다.


여자와 만날수록 정이 드는 게 아니라 정이 떨어질 지경까지 이르자 나는 여자와의 만남을 점점 기피하게 되었는데 결국, 4번까지만 만나고 그 후로 연락을 끊었다. 남자들은 대체로 상대방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연락을 하지 않는다.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그런데 여자는, 물론 모든 여자들이 그렇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남자가 갑자기 연락을 끊어버리면 왜 그런지 이유를 알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내가 연락을 끊어버리자 15일 정도 지날즈음 여자에게서 내가 일하는 회사로 전화가 왔었다.

연락을 하지 않으면 여자가 눈치를 채고 순순히 나를 떠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전화기 너머 여자는 왜 연락을 하지 않느냐고 내게 따지듯이 물었다. 그녀의 말을 듣고도 나는 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한숨을 쉬면서 무겁게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우리는 성격이 서로 잘 맞지 않는 것 같은데 그만 만나면 좋겠습니다...


일방적인 나의 결별 통보에 여자도 한 동안 말이 없었다. 잠시 후... 여자는 낮은 목소리로 이유가 뭔지 내게 물었지만 나는 그저 미안하다는 말 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그 이유를 전화로 시시콜콜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내가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자 여자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내게 매달렸다. 내가 원하는 여자가 되어 줄 테니 제발 헤어지지 말자고.


내가 원하는 스타일의 여자가 되어 주겠다고?


뜻 밖으로 여자의 매달림에 나는 당황했다.


헤어지자고 하면 여자는 쿨~하게 그러마!~ 하고 말할 줄 알았는데 이젠 울며불며 헤어지지 말자고

내게 애원까지 하는 것이다. 이제껏 많은 여자와 만나고 헤어졌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와 데이트할 적에도 손 한번 잡아본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까지 내게 매달릴 줄은

전혀 예상을 하지 못했었다. 여자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내가 헤어질 마음을 바꾸지 않자 그녀는 마지막 요청까지 하였다.


결혼은 하지 않아도 좋으니 그저 아는 사이로 지내자고.


아니? 이건 또 무슨 경우란 말인가? 그냥 아는 사이로 만나자고?그러나... 나는 여자의 그 요청마저 냉정하게 거절하고 말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내가 왜 그렇게 매달리는 여자를 냉정하게 떨쳐냈는지 모르겠다. 그냥 눈 딱 감고 그때 못 이기는 척 그 여자와 결혼했으면 어쩜 내 인생이 활짝 피었을 것을... 현실적으로만 본다면 그 여자는 내게 딱 맞는 여자일 수도 있었을 테니 말이다. 생활력 강하지, 경제관념 철저하지, 남들처럼 명품 옷이나 가방 사 주지 않아도 되지, 더구나 노모까지 모시고 살 수 있다고 하는데 그런 여자 찾기가 결코 쉽지 않은 세상에 나는 그만 굴러들어 온 호박을 발로 걷어차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과 이상은 결코 함께 할 수 있는 친구가 되지 못하는 법.여자가 내 이상형이 아니라고 느껴지자 현실은 저 멀리 무지개 너머로 사라지고 말았다.


여자들은 설령 상대방 남자가 마음에 좀 들지 않더라고 남자가 목숨 걸고 쫓아다니면 마음이 돌아서는 경우가 있겠지만 남자들은 한번 마음이 떠나면 그걸로 끝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한번 여자가 싫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그녀가 아무리 울며불며 매달려도 절대 마음이 돌아서지 않았다. 아무리 매달려도 나란 남자가 절대로 마음이 돌아서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 여자는 내게 저주스러운 한 마디를 남기고 전화를 끊고 말았다.


"나는 곧 다른 남자 만나서 결혼하겠지만 너는 절대로 결혼하지 못할 거라고"


어이구야... 여자의 저주대로라면 나는 평생 장가도 못 가고 총각귀신이 된다는 말이네? 그녀가 왜 나에게 그런 무시무시한 저주를 퍼 부우며 떠나게 되었는지 이유는 분명했다. 여자가 정말 내가 좋아서 그렇게 매달린 것은 아니었다. 나 만나기 전에도 다른 남자에게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퇴짜를 맞아서 마음이 엄청 상했었는데 눈 씻고 찾아보아도 남자로서의 매력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나란 놈에게 또 퇴짜를 맞았으니 그녀가 받게 된 마음의 상처는 거의 핵폭탄 수준이었을 것이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스키장이 개방한다더니 정말 그 후로 별 희한한 여자들만

만나게 되었고 결국은 내 나이 48세에 대한민국에서는 내 여자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결국,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국제결혼으로 여자의 저주를 13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에야 겨우 벗어날 수가 있었다.

지금의 아내와 살면서도 내가 왜 그때 그 여자를 잡지 못했는가 하는 후회가 들기도 하지만 이미 흘러가버린 강물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태평양 한가운데를 떠 돌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