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다 한 이야기 22화

이상의 무지개와 현실의 사막.

by 현동인

처음 남녀가 만나서 사랑의 감정으로 가득 차 있을 때 현실적인 문제들은 모두 극복할 수 있다고 여길 것이다.


그만큼 두 사람 사이에는 온 우주를 품고도 남을 이상의 에너지로 가득 차 있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에너지들은 점차 소모되는 반면 현실적인 문제들이 그 거대한 에너지들이 차지했던 공간을 치고 들어오게 되면 그때서야 두 사람 사이에 씌워졌던 콩깍지가 떨어지게 된다.


은영이와 한창 사랑에 빠져 있었을 때는 그녀 어머님의 완고한 반대를 이겨내고 은영이의 헤픈 경제관념조차도 모두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었지만 내가 먼저 현실의 눈을 뜨는 순간, 이상은 허무하게 날아가고 말았다.

언급했듯이 그때 나는 금은세공업체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연봉이 높은 대단한 기술자도 아니었고 그저 이제 기술을 막 배우는 단계에 있는 상태였기에 당시 내 월급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다고 앞으로 이 계통에서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었다. 금은세공업체에서 나이가 많다는 것은 아주 치명적인 단점이다. 주로 손으로 하는 작업들이 대부분이었기에 20대 젊은 동료들에 비해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아무래도 작업능률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데 기술도 별로였던 나 같은 사람들은 오래지 않아서 퇴출될 수밖에 없었다.


단지, 친구형님이 운영하는 회사였기에 나중에 관리자로 일할수는 있었겠지만 회사는 언제 부도가 날지 모를 정도로 매우 부실했다.

그런 회사를 다니는 주제에 은영이처럼 고생 한번 하지도 않아서 세상물정 모르고 온실 속의 화초로 자라온 그녀와 결혼해서 아이 낳고 키우며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는 자신이 없었다.


은영이의 돈 씀씀이는 도저히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고 쌀밥 먹으면서 잘 살아온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보리밥 먹으면서 살기는 매우 어려운 법이다. 더구나 유부남에게 마음을 빼앗길 정도의 여자라면 한 마디로 은영이는 사리판단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지조 또한 매우 약한 여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녀와 헤어질 결심은 더욱 굳어졌다.


다행히 은영이와 나는 그때까지도 깊은 관계는 아니었다. 만약, 깊은 관계였다면 그녀와 헤어지기는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지만 남녀관계는 칼로 무 베듯이 단번에 자르면 누구 한 사람은 큰 마음의 상처를 받기 마련이다.

나는 이미 마음을 정리했지만 은영이는 나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었기에 그 후로도 만남은 계속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은영이에게 선을 보겠다고 말했다.


이젠 정말로 여자와 헤어지겠다는 나의 결심을 말한 것이다. 그녀와 나 사이는 예전의 뜨거웠던 감정도 많이 식은 상태였기에 선을 보겠다는 나의 말을 듣고도 여자는 덤덤한 것처럼 보였지만 새벽 1시가 넘어서 은영이는 술에 취한 목소리로 내게 전화를 했다.


오빠!~~ 낼 선 본다고 했지... 잘 됐으면 좋겠네...


술에 혀가 꼬부라진 여자의 말은 마치 나를 체념하는 듯한 말투였다. 사실, 나는 얼마 전에 명동성당 옆 건물에 있는 가톨릭 결혼상담소라는 곳을 방문했었다. 그곳에는 신자들과의 중매를 알선해주고 있었는데 얼마의 회비를 내면 등록된 여성들과 선을 볼 수 있었다. 그때 내 나이는 이미 30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었으니 더 이상 결혼을 미루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상담소는 후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서 없어졌지만 내가 방문했을 때는 한창 중매를 알선하고 있었고 4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혼자서 상담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상담소 소장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나의 외모와 스펙을 보자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남들 다 가는 그 흔한 전문대조차도 나오지 못했고, 다니는 회사 또한 영세 가공업체에 불과한 데다 비썩 마른 체구에 정수리부터 원형 탈모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던 내 몰골은 여자인 자기가 보아도 남자로서 매력이라곤 눈 씻고 보아도 찾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 녀석이 결혼을 하겠다고 찾아왔으니 가소롭기 그지없었을테지.


나는 소장으로 보이는 여자의 미소가 어떤 뜻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뻔뻔하게 여자들의 스펙들을 보았다. 문제는, 그곳에 등록된 여성들의 스펙들이 매우 화려하다는 것이다. 대부분 명문대학 출신들에다가 좋은 회사에 다니면서 받는 연봉들은 어마어마했다.

이런 여성들과 선을 본다? 나 그렇게 주제파악 못할 정도로 덜 떨어진 남자 아니다.


그러던 중, 한 여자가 눈에 뜨였는데 그녀는 고졸에다가 어느 섬유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는 여성이었고 이 정도 스펙의 여성이라면 나와 어느 정도 잘 맞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외모는 수수하지만 지금 내가 여자 외모 따위를 가릴 처지는 아니었기에 나는 그녀를 지목해서

선을 보겠다고 하였다. 소장은 내가 지목한 여자의 사진을 보더니 나를 한번 쳐다보았다.


글쎄요... 형제님보다 자매님이 8살이나 아래인데 만나겠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한번 연락을 해보죠.


그렇게 소장은 여자에게 전화를 돌렸는데 나를 아주 스마트하게 생긴 남자라고 소개를 해 주었다.

내가 스마트하게 생겼다고? 역시 이 여자는 장사꾼에 불과하군... 하고 속으로 되뇌었다.

중매쟁이들이 다 그렇듯 상대방들에게는 항상 과장되게 말을 한다는 것이다. 결혼상담소는 얼마간의 입회비를 내고 회원으로 등록을 한 뒤에 나중에 결혼이 성사가 되면 또 적지 않은 사례금을 양쪽 회원들이 상담소에 내야 되는데 그러자면 어떡하든지 소장은 결혼을 성사시켜야 했다.


그래서 중매쟁이들이 흔히 하듯이 상대방에게 소개를 할 때는 과장되게 설명을 하는 것 같았다.

어쨌든,소장의 사탕발림에 내가 지목한 상대편 여성은 선을 보겠다 하였고 그날이 바로 은영이를 만났던 다음날이었기에 그녀는 친구와 만나서 술을 마시고 내게 전화를 했던 것이다. 비록, 말로는 나와 선을 볼 여성과 잘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였지만 전화기 너머 은영이의 목소리에는

진한 아쉬움이 배어 나오는 듯 들렸다.


이렇게 은영이와 헤어져야 했다면 차라리 만나지나 말 것을... 하는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제 와서 그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녀와 사랑에 빠져 있었을 때는 그 어떤 어려움도 다 극복할 수 있다고 철석 같은 믿음으로 달려왔었는데 현실의 벽에 부닥치자 그런 것들은 한 낮 파도에 부서지는 물거품에 불과했던 것이다.

나는 그저 영혼 없는 말로 그녀를 위로할 뿐, 더 이상 여자에게 할 말이 없었다.


나와 은영이의 대화 내용을 듣고 계셨던 어머님은 도대체 어느 여자가 예의도 없이 새벽 1시가 넘어서 술에 취해 남자에게 전화를 하느냐고 호통을 치자 그녀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80을 바라보셨던 노모의 상식에 새벽 1시가 넘어서, 더구나 여자가 술 취한 목소리로 아들에게 전화를 하는 꼴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으셨을 것이다. 은영이에 대한 어머님의 핀잔을 뒤로한 채 나는 오지도 않는 잠을 억지로 청하고 이불을 덮은 체 눈을 감았다. 새로운 여자와 만나게 되는 오늘 일요일 오후 2시는 내 인생이 바뀌게 되는 운명의 시간이 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