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런 날 있잖아요

탈선을 애초에 하려고 한건 아닌데

by 호윤 우인순 시인

왜 그런 날 있잖아요.

퇴근해서 집으로 가는 버스정류장

노란 은행잎이 수북이 쌓인 거리가 너무 황홀하고 멋져

무작정 걷게 되는 그런 날이 있었다.

불빛에 젖은 은행잎이 유난히도 아름다워

무작정 걷다 누구라도 차 한 잔 하자고 하길

기대하며 은행잎에 푹푹 빠져 걷는데

환하게 비춰오는 하얀 달빛 속에

"저녁 시간인데 뭐 하고 있는 거니? “

싸늘하게 부딪히는

시어머니의 매서운 눈동자를 뒤로하고

아무도 없는 노란 거리를 은행잎이 되어 날아다니며 "가을은 모든 잎이 꽃이 되는 번째 봄이다"라는 알베르 까뮈의 말을 떠올리며

그래 가을은 나도 한 장의 낙엽이 되는 고운 꽃이지

아름다운 꽃이지

우수수 노란 은행잎 한 장 두 장

사랑한다는 그대의 고백이 적혀 있는 아름다운 엽서로

길은 노랗게 쌓이고, 이십 대 고운 모습으로

길에 앉아 엽서를 읽고 있는 소녀가 있었다.

세월이 흘러가는 줄도 모르고

붉게 타오르는 청춘 같은 붉은 노을

그 노을 속을 따라 걷고 있노라면

인생은 어쩌면

저 한 장의 낙엽과 같이 곱게 물들어

예쁜 엽서가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엽서에 무엇이 적혀있는지는

하늘 길 열리면 볼 수 있겠지

땡땡땡! 성당의 종소리가 들렸다

마치 드레스를 입고 무도회에 춤추던 신델레라가 마법에서 풀려나는 시간의 종소리처럼

"뭐 하는 거야? 집에 가야지

저녁을 해야 되는데, 왜 거기 있는 거야?"

누군가 소리를 치는 것 같아, 아! 큰일 났다

시어머니의 칼날 같은 목소리가 들리고

이제 막 시집온 새댁은 무서워서

집에 갈 용기가 나지를 않았다.


일찍 집에 가려했는데 누군가 그런 날이 있지 않을까?

무작정 노란 은행잎을 밟으며 걷고 싶은 충동이 있는 날

메피스토 폘레스의 손을 잡고 무작정 거리를 헤매다 정신이 들어 손목시계를 보니 밤인 날


아 그랬구나!

학교에서 밤늦도록 집엘 안 가고 놀다

온 가족이 찾아 나선 명식이를 생각해 보았다

밤 열한 시에 공원에 앉아 떨던, 아이가 하는 말

그렇게 무작정 놀려고 생각한 건 아닌데

놀다 보니 너무 늦어

아버지가 무서워 집엘 못 가고 공원 벤치에 앉아 떨있었단 말이에요.

그러려고 생각한 건 아녜요

그렇다 나도 그러려고 생각한 건 아닌데

노란 은행잎을 보자 마지 누군가의 손에 이끌리어 정신없이 걸었다.


아이들도 그랬구나!

탈선을 애초에 하려고 한건 아닌데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정신없이 빠져 있다 보니, 집에 들어갈 시간을 놓쳐 떨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인간에게는 그런 날이 있다


이상한 나라 엘리스에서

"오! 맙소사 너무 늦었을 것이다 "

시계 토끼가 바쁘다 바빠 소리를 치며

양복조끼를 입고 걸어가고

엘리스는 그 뒤를 이어

토끼 구멍을 따라 원더랜드로 향하지요

우리도 그런 날이 있습니다.

나도 그랬습니다.

그러려고 마음을 먹은 적이 없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밤늦도록

은행잎이 떨어지는 거리를 헤매며 행복해하고 있었지요.

어떡하지 집엘 가기가 무서워 친정집엘 갔는데

, “너 혼자 왔니?”

물어보시는 아버지 말에

! 하며 밥상을 대하니 눈물이 났다

다시는 집엘 가기가 무서워서

아버지의 날개에 숨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나의 아버지는

딸을 데려가라고 사위한테 전화를 했던 것이다


그날 나는 집에 들어가 아주 큰 죄를 지은 탈선 학생처럼 무릎을 꿇고

시부모님께 싹싹 빌었다

집에서 쫓겨나면 갈 곳이 없었던 것이다


살면서 나에게 그날은 참 많은 교훈이 되었다

학생들 앞에 서면

나는 가장 인간적으로 그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런 날이 있단다.

나도 그랬었지 하며 겁내지 마! 솔직히 말하면 돼

걱정을 끼친 건 죄송하지만,

사람은 한 번쯤은 그런 날이 있겠지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되는 그런 날

바쁘다! 바쁘다! 뛰어가는 시계토끼를

따라 들어가 황홀한 꿈을 꾸기도 하고 다시 깨어나 하얗게 웃으며

꿈을 향해 날아가는 리빙스턴의 조나단 갈매기가 되어보기도 하지요


인간은 하나의 도자기를 빚는 것과 같은 것 ,

살아가며 조금씩 수정하고 또 돌리고 돌려 광을 내고 멋진 그림을 그리고

뜨거운 불속에서도 인내하며 빛이 나는

멋진 도자기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사람이 살면서 한 번쯤은 그런 날이 있는 것 같다

나에게도 살아가며 몇 번인가 그런 날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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