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동 일기

by 호윤 우인순 시인


병동 일기 중/ 이제는 볼 수 있는 나이인데


풋사과의 싱그러움과

이제 막 물이 오르는 나무들의 싱그러움과

갓 피어난 꽃들의 맑고 고운 눈 속을

이제는 볼 수 있는 나이인데

짙게 푸르름에 물들어 가며 하나, 둘

서서히 울긋 불긋 재색을 찾아가는 낙엽과

익어 가는 사과의 탐스러운 완숙함에

고개 숙이며 숙연해지는 계절 가을,

하루의 긴 여행 끝에

이제 막 짐을 챙겨 산마루를 넘는

노을빛아래 빛 잃은 해를 바라보며

나의 지난 세월의 뒤안길을 되돌아본다.


거울 앞에 비취이는 허연 회빛 잃어 가는 세월의 그림자를 이제는 볼 수 있는 나이인데

떨어지는 낙엽 길을 걸으며 설레던

푸르른 시절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건

이제는 정말로 참사랑의 의미를 알기 때문이고

그 사랑이 인간을 얼마나 푸근하고 편안하게

세상을 바라보며 걸어 가게 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이제는 모든 걸 볼 수 있는 나이 이기 때문에

더는 흔들리며 방황하지 않고 붉게 타오르는 저녁 하늘아래 유유히 밝은 웃음 한 자락 띄우며

마지막 언덕길을 걸어가고 싶기에

사랑이 그토록 소중하고 그리워지는지도 모른다.


병동의 하루는 정말로 무료하고 힘든 하루이다

그 하루를 헛되이 보내고 싶지 않아 부지런히

무언가 찾아 하는 것이 나의 습관이 되어 버렸다고나 할까? 참 인간의 시간은 덧없이 가고 젊음 또한 세월처럼 그렇게 가고

서산에 해가 지듯 황혼이 오고

노을빛 아래 어둠이 서서히 깔리기 시작하듯

사람의 생 또한 무한하지 않고

어느 사이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어둠처럼 내려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천만년 살 것 같이 욕심부리고

그 욕심 빨리 잡고 싶어 서두르고 급해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모두 소용없는걸,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똑 같이 한평생을 살다 가지만, 바위로 살든, 풀로 살든, 꽃이었든 소나 돼지로 살든

무엇이 그리 소중하고 중요할 것인가?


바위는 바위로, 소는 소대로, 풀은 풀대로

스스로 만족하며 풀은 풀답게, 바위는 바위답게 살았으면 된 것을...

그것이 행복이고 그것이 아름다움인 것을....


국화가 라일락 같이 피어난다면 ,

어디 그것을 국화라 할 수 있을것이가?

국화는 국화로서 가장 아름답게 피어나면 되는 것을.....

병원에 오니 각양가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박사님, 농부아저씨, 공사판의 노무자, 부자들, 가난한 사람들 하지만 가난해도 우애 있고 사랑이 넘치는 환자들이 있는가 하면.

명예와 부는 다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싸늘하고 쓸쓸하여 매일 울고 찡그린 얼굴이 있다.

무얼 보면 알 수 있는가 하면,

우선 그 얼굴 표정을 보면,

아주 편안히 여유가 있는 사람이 있고 아니면 무언가

쫓기는듯한 얼굴이 있고, 말한 마디도 아주 냉정히 신경질적인 사람이 있고 보호자가 오는 걸 보면, 늘 사랑이 넘치는 만남이 있는가 하면 오긴 와도 왠지 싸늘한 모습과 형식적인 병문안

또는 오기 싫은데 와서 온갖 잡소리 다하고 가는 환자의 가족들!


어느 날은 가족들이 와서 화기 애애한 웃음의 소리가

들리는 집이 있는가 하면

시끄럽게 싸우고 난리인 집 여러 가지 집들이 있다.

그 속에서 난 어떤 가족들과 살면 행복할 것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철없던 어린 시절 미팅을 해도 멋있고 핸썸하고, 일류학교여야 하고

조건이 어떻고..... 참 이유도 많았다.

그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작업 복을 입고 흙속에 사는 일자무식이라 해도

그 인품이 무르익어 겸손하고 사랑에 넘치며

따스하면 되는 것을....

인간은 모두 벗으면 똑같은데.... 무에 그리 잘난 것일까?


사람의 행복을 병실에 앉아 보니

여러 가지 유형으로

눈에 들어와 보이고 있었다.

새로 태어난 아기에서 느끼는 생명력이나.

갓 피어나는 열일곱 사춘기 소년 소녀들에게서

느끼는 싱그런 건강미나..... 젊음!

그리곤 성숙해지는 20대에서 느껴지는 젊음이나....

40대에서 느껴지는 내면의 완숙된 여지는

인간의 아름다움이나

50이 넘어가면서 보이는 인간의 늙음이랄까?

이곳 병원에 오니, 70의 노년에 느끼는 죽음의 냄새 같은 것들이 비릿하게

한꺼번에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나의 모습은?

투명하 거울에 비취이면서..... 어쩔 수 없는 세월 속에....

떨어지는 낙엽 같은 나를 바라다보며, 나머지 남은

내 인생의 시간들을 참으로 값지고 헛되지 않게 살아야 하지 않나?

자문해 보았다.


건너편 병동에 가면 시한부로 사는 환자들이 오늘도

방사선 치료를 받고 있다. 하지만 그들 중에는 참으로 밝고 고운 마음으로 얼마 남지 않은 시간들을 소중하고 감사하게 하루하루 엮어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이라고 절망하고 울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조용히 체념하고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현명한 선택을 하였으리라 생각한다.

그렇다 세상 사는 모든 사람들이 다 이들 같다면

자기들의 인생을 천만년 누리려 하지만 않는다면,

서로 베풀며 안아주고 사랑하며 살 수 있지 않을까?


이제는 모든 걸 볼 수 있는 나이에 온 것 같이.....

모든 세상 인생사를 느낄 시간도 되었으련만

아직도 싸늘히 자신의 욕심과 허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 세상 사람들이 오늘은 안타까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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