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나무

by 호윤 우인순 시인

인디언 공주 - 밤나무

참나뭇과 낙엽활엽 교목인 밤나무를

본 것은 여섯 살 봄이었다

할아버지가 산엘 가면서 데리고 갔기 때문이다

산 가득 밤나무 천지였다 할아버지는

"이 산이 전부 우리 산이란다

삼만정 보란다" 하시며 잘 가꾸어야 하는데

할아비가 너무 늙었구나 하셨다

나는 그 말이 힘들다는 말로 들렸다

그것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나 아주 산이

넓어 힘든다는 것은 금박 알 수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밤나무가 봄에

온통 초록 세상을 만든 다음 하얀 꽃을 피웠다

할아버지는 밤나무는 밤에도 눈부시게 피는 꽃이라, 옛날 선조들이 낮인데도

밤나무라고 부른 것 같다고 했다


여덟 살 어느 날 새로 산 빨간 구두를 신고

밤나무 산엘 갔다

엄마랑 숨바꼭질 하며, 노래도 부르며

껑충껑충 좋아라 뛰면서

숲을 가고 있는데, 별안간 빨간 구두에

커다랗고 통통하며 털이 많이 난 푸른 벌레가 뚝! 떨어져 꿈틀꿈틀 하는 게 아닌가!

놀라 땅바닥에 앉아 소리치며 울었다


엄마는 깜짝 놀라서 부르르 떠는 나를

꼭 껴안고 "아가 툭툭 털고 신는 거야

살다 보면 더 무섭고 더러운 것이 많단다

그때마다 울면 지는 거야"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내가 커가면서 그 말이 저 혼자

수 십 년을 교회당 종소리처럼 이따금씩 울렸다.


그날 끝내 벌레가 무서워 새 구두를 버린 나는, 살면서도 무섭고, 더럽고 치사한 일이

많이 생길 때마다, 툭! 툭 털지 못해 신을 버리듯,

버린 기회와 일들이 많아

그것들이 미아가 되어 가끔씩 뒤돌아보면

찔레꽃 열매처럼 빨갛게 눈 비비고 울고 있었다


내가 그날, 빨간 구두에 벌레를 툭! 툭 털고

신었더라면 나의 삶은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날 이후, 나는 밤나무 숲을 지나는 일이 그리 쉽지가 않았다

학교 가는 산길에 밤나무가 있어서

벌레가 무서워 갈 수가 없어

"학교 안 가고 싶어" 하고 우는 바람에

유모 엄마는 커다란 우산을 주었다

봄에서 여름 내내

밤나무 길을 지나려면 우산을 쓰고

다녀서 아이들이 나를 우산이라고 놀렸다


가을이 되자 아홉 살 많은 언니가 유모엄마에게 바느질을 배우러 시골로 왔다 얼마 지나자 언니는 재봉으로 옷을 아주 잘 만들어서 내 옷도 척척 만들어주었다


우리 동네는 양주군 별래면에 있고

그곳에서 조금 나가면 미군 부대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주말엔 밤을 따려고 미군들이 놀러 왔다

할아버지는 한 나무만 허락하셨다

거기서 마음껏 밤을 따라는 것이다

가을이 되니, 무섭던 푸른 벌레도 어디론가

가버려서 나는 밤 따는 구경을 갔다

우리와는 생김이 다른 미군들이 호기심이

나서이다 미군부대에 근무하는 이모부부도 나타나니 더욱 좋았다

이모는 올 때마다 미군 부대의 초콜릿과

내가 못 보던 칠면조 고기나 계란과 자을

가지고 온다 그래서 더 신이 났을지도 모른다


가을 되니 할아버지는 사람들을 사서

밤 따기를 해서, 밭 한쪽에 가득

밤송이를 쌓기 시작했다


언니는 아침마다 나를 깨운다

"밤 주우러 가자"라고 나를 툭툭 쳐서 깨운다

나중에 알은 것이지만 주운 밤은 팔아서

가져도 된다는 할아버지 말씀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나는 이른 아침

산으로 놀러 가는 게여간 즐거운 것이 아니었다 바람이 불면 이슬이 우수수

나무 가지에서 떨어지며

밤알도 우수수 떨어진다

어떤 날은 머리에 툭 툭 떨어지면 많이 아팠다

땅을 보면 혼자 떨어진 밤이 상당히 많아서

자루 가득 밤을 넣는 게 재미있었다.

언니하고 나는 노래를 부르며 밤을 주웠다

밤을 주운 날 아침은, 언니가 나하고

논길을 걸어 미군부대가 있는 곳에 데려가 맛있는 것을 사주기도 해서

밤 주우러 가는 것이 더욱 신났다


늦가을이 되니 산더미 만한 밤더미에

아저씨들이 물을 뿌리고 덮게를 덮는 것이다

참 궁금했다 왜 밤을 까지 않고

그렇게 하는지가, 겨울이 되려 할 때

사람들이 덮게를 벗기고 밤 까기를 시작했다 따가운 밤송이가 건드리기만 하면 허망하게 무너져 밤알이 쏙 나오는 것이다 그해는 언니도 밤을 꽤 많이 주워서

수입이 컸던 모양이다

나에게도 언니가

빨간 털실을 사다가 장갑과 목도리를 만들어 주었다


겨울이 되니 아주 추워지고

할아버지는 "해 지기 전에 집에 와야지

늑대가 나와서 물어간다"라고 하셨다

겨울의 시골은 일찍 해가 지고

우리 집은 마을과 좀 떨어진 산 밑이라서

무서워서 일찍 집에 왔다

방학이 되니 방에 화롯불을 피우고

유모 엄마는 다리미에 숫을 넣어 옷을 다리고 나면, 화롯불에 밤을 구워주었다

밤이 익어갈 때쯤이면 구수한 냄새가 났다

화롯불에 구운 뜨거운 노란 알밤을 호호 불며 먹는 겨울밤

그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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