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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요유 Jun 17. 2023

야생화와 함께 한 하늘길

2023.05.03

야생화와 함께 한 하늘길

  친구가 내려주는 모닝커피는 언제나 맛있다. 커피와 빵을 제공해 우리의 아침을 근사하게 만들어주는 친구와 여행 계획을 짜고 실행하는 친구가 옆에 있는 아침이었다. 나이 들수록 친구가 좋다고 하던데, 그 말은 사실인 듯싶다. 즐거운 대화를 곁들인 가벼운 아침 식사로 상쾌한 하루를 시작했다.

  하이원리조트에는 ‘하늘길’이라는 트레킹 코스가 있다. ‘하늘길’은 둘레길, 고원 숲길, 운탄고도, 무릉도원길로 이루어져 있어서, 우리는 그중 고원 숲길을 걷기로 했다. 마운틴 곤돌라를 타고 20분쯤 올라 1340 고지인 하이원 탑에 도착했다. 밖으로 나오니 움직이지 않는 그네가 있었다. 사진 찍는 자리인가 보다. 그 아래로 산들이 굽이굽이 펼쳐져 있어서 눈이 시원했다. 산등성이와 맞닿은 하늘은 푸르렀고, 흰 구름이 군데군데 뜬 풍광이 상쾌했다.

  안내판에서 고원 숲길 3코스를 확인하고 걷기 시작했다. 백운산 마천봉까지 왕복 3.6km를 걸을 예정이었다. 해발고도 1340m에서 시작하여 1426m인 마천봉까지 걷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 힘든 코스는 아니었다.

  숲길이 시작하는 곳에 지난 2016년의 ‘세계명상대전’ 때 ‘하늘길’을 다녀간 유명한 명상가 네 명의 핸드프린팅과 안내문이 서 있었다. 그들은 어떤 마음으로 이곳을 바라봤을까? 자연 속에서 호흡하면서 걷는 게 명상이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그들의 심오한 명상 세계를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조금 걸어 내려가니 바로 숲길이 시작되었다. 부드러운 흙길이 아니라 돌이 많은 좁은 길이었다. 돌길을 걸을 때 넘어지지 않으려면 땅에서 눈을 뗄 수 없다. 주변 풍광에 아랑곳하지 않고 땅만 보고 걷다 보니 울퉁불퉁한 돌 사이로 비집고 올라온 작은 꽃들이 눈에 띄었다. 돌 틈에 핀 야생화의 생명력에 감탄하면서 숨을 몰아쉬고 오르막 돌길을 올랐다.

  “어머나, 세상에!” 탄성을 지르는 친구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길 양쪽으로 얼레지 꽃밭이 펼쳐져 있었다. 높은 지대의 비옥한 땅에서만 자라는 꽃이라는데, 이렇게 한꺼번에 많이 피어 있는 건 처음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심어서 정성스럽게 가꾼 꽃밭인 양 화사한 게 놀라울 정도로 예뻤다.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이 시간에 우리를 이곳으로 이끈 신비로운 힘이 있지 않을까 하는 비현실적인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고원 숲길 3코스는 야생화의 천국이었다. 이름도 모르는 각양각색의 꽃을 사진 찍고, 이름 탐색하느라고 걷기는 뒷전이었다. 얼레지, 현호색, 개별꽃, 노랑매미꽃, 바람꽃, 산괴불주머니, 흰붓꽃, 피나물 등 비슷비슷하지만 각기 다른 꽃들의 이름이 재미있었다.

  정말 수많은 이름으로 존재하는 들꽃을 기억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지만, 그중에 하나라도 기억해 주자고 생각하였다. 기억하지 않으면 무의미하게 지나간다는 것은 뒤늦게 깨달은 사실이다. 꽃이든 사람이든 이름을 기억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냥 하루하루를 사느라고 바빴다는 핑계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내 인생을 이루는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되새기면서 ‘김춘수’의 <꽃>을 떠올려 본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놀며 쉬며 감탄하며 오르다 보니 어느덧 마천봉 정상이었다. 정상 표지석 앞 쉼터에서 달달한 간식으로 체력을 보충하며 시원한 산바람을 느껴보았다. 아무도 없는 산 위에서 함께 올라온 친구들과 담소도 나누었다. 걱정 없이 편안한 시간이었다.

  힘들게 한 발 한 발 걸어 올라가 만난 자연은 언제나 만족감과 행복을 안겨 주었다. 옛 선조들이 말 없는 자연을 친구라고 표현한 이유가 이것 때문이 아니었을까?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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