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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요유 May 30. 2023

매화가 있는 토지길을 걸으며

2023.03.16

아침 6시.

눈을 비비며 일어난 곳은 낯선 모텔. 집보다 편하지 않은 이 곳에서 눈을 뜨고 느낀 첫 감정은 설렘과 자유로움이었다.

서둘러 찾아간 첫 여정은 광양 매화마을.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았다. 전에 찾았을 때는 사람이 많아 복잡했고, 온갖 색으로 화려한 매화마저 어지럽게 다가왔다. 감동이라기보다는 놀라움이 더 어울렸다고나 할까. 그러나 여명 속에서 바라본 매화마을은 은은한 정취를 내뿜고 있는 고요함과 평화로움의 공간이었다. 옅은 어둠 속에서 하얀 매화꽃이 융단을 깔아놓은 듯 펼쳐져 있었다. 길을 따라 오르다 만난 정자에서 내려다본 섬진강도 고요했다.

조금 더 올라 높은 언덕에 서서 일출을 기다렸다. 오르는 도중에 마주친 적 없던 사람들이 그곳에 다 모여 있었다. 온갖 종류의 카메라를 손에 들고서. 일출은 언제 어디서나 모든 사람들에게 기대되는 순간인가 보다. 주변이 점차 붉은 색으로 밝아지면서 흰 매화 사이로 진하게 붉은 홍매화와 산수유가 자신의 색을 뽐내기 시작했다. 눈앞에 펼쳐진 매화의 화려한 색깔이 떠오르는 태양의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정신없이 셔터를 눌러대다가 또 다시 깨달았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사진에 담을 수는 없다는 것. 안타깝지만 눈과 마음에 저장하고 자리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하동읍에서 재첩국으로 아침의 쌀쌀함을 달랜 후 악양면의 상신마을로 향했다. 취간림, 조씨고택, 매실 농장을 지나 토지마을 최참판택까지 6.5km의 ‘토지길’을 걸어보기 위해서였다. 이곳은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가 된 지역이다.

첫 출발지인 취간림은 ‘푸른 물이 흐르는 숲’이라는 뜻으로, 악양천이 보이는 곳에 조성되었다. 취간림의 정자인 팔경루 앞에서 짐을 정돈하고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했다. 아직 이른 봄이지만 햇볕이 따뜻했다.

조금 걸어가니 상신마을임을 알리는 표지석과 장승이 서 있었다. 마을 수호신인 장승은 언제나 반갑고 정겨운 느낌이 든다.

조용한 농촌 길을 따라가다 보니 조씨 고가로 알려진 화사별서에 도착했다. 조선의 개국공신 ‘조준’의 직계손인 ‘조재희’가 만든 별장이라고 한다. 대문을 들어서니 연못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가운데 돌섬과 나무가 있는 장방형의 작은 연못에 옛 조상의 정취가 깃들어 있는 느낌이었다. 그곳에서 몇 개의 돌계단을 올라선 곳이 안채였다. 동학농민전쟁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사랑채와 행랑채, 초당, 사당이 불타 없어지고 안채만 남았다고 한다. 안채 툇마루에 앉아 보니 평사리 들판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 집에 가끔 놀러 왔다던 박경리가 <토지>의 ‘최참판댁’이라는 상상의 무대를 이 툇마루에 앉아서 생각했을 것만 같았다.

안채 툇마루 위에 매달린 곶감과 말끔히 정리된 장독대의 항아리가 지금도 이곳이 살림집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안채 뒤쪽으로 조금 올라간 곳에 조성된 넓은 차밭도 그랬다. 조씨 고가는 박재된 문화재가 아니었다. 아직도 후손이 살면서 정갈하게 보존하고 있는 삶의 현장이었다.

조씨 고가를 나와 탁 트인 넓은 들판을 바라보며 걸으니 마음은 시원했으나 내리쬐는 햇볕 때문에 몸은 더웠다. 매실 농장의 매화 향기로 몸의 힘듦을 위로받으며 무념무상의 걷기를 하다보니 어느새 ‘최참판댁’에 도착하였다. 이 집은 실제로 존재했던 곳이 아니라 <토지> 드라마를 위해 만든 세트장이다. 소설 속의 한옥 14동을 재현해 놓은 곳이다. ‘최참판댁’ 누마루에 앉으니 예쁘게 꽃 핀 자목련 너머로 탁 트인 악양 벌판이 내려다 보였다.

평사리 벌판을 배경으로 대하소설을 구상한 박경리의 위대함에 탄복하면서 <토지>를 한 번 더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참판댁’을 나서자 넓은 터에 아주 큰 상수리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나무 아래 벤취에 앉아 있으니 지나가는 바람에 몸과 마음이 시원해지면서 잡념으로 괴롭던 일상들이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고등어 조림과 청국장 맛이 기막힌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거나하게 먹고 버스에 올라타 집을 향해 출발했다.

돌아오는 길에 잠시 들른 지리산 자락의 용궁마을 숲길은 한적하여 새소리만 들렸다. 땅만 보고 걷다가 고개 들어 하늘을 보니 푸른 하늘에 흰구름이 평화롭게 펼쳐진 가운데 지리산의 봉우리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또 아래로 시선을 돌리니 푸릇푸릇한 보리밭과 노란 산수유가 어우러져 봄의 찬란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이 내 눈에 들어왔던 그 순간. 그런 작은 행복의 시간으로 인해 남은 생에 대해 희망을 품게 되는 것이 아닐까?

집으로 향한 버스 안에서 흔들흔들 머리를 조아리며 잠에 빠져 들었다. 버스에서 흔들리는 이런 인생이 나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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