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수요일 퇴근 후 독서모임에 간다. 매주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하다 보니 시작 전 항상 짧은 자기소개 시간을 갖는다. '나는 OOO 한 사람입니다.'라는 하나의 문장으로 이야기 나눈다.
처음 위 문장을 보고 떠오르는 표현이 없어서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독서모임에 함께 한 대부분의 사람들도 위 문장 앞에서는 조용해진다. 길게 소개하려면 떠오르는 대로 이야기하면 될 일이다. 하나의 문장으로 '나도 나를 잘 모르는 나'를 표현하려고 하니 더 모르겠다.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는지, 사고가 멈춘 건지, 표현 능력이 부족한 건지 영문을 모른 채로 고민하는 척했다.
그렇게 독서모임 첫날에는 이름만 말하고, 독서모임에 참가하게 된 이유에 더 정성을 들였다. 그러다 다음번 모임에 참가했을 때는 '나는 해맑은 사람입니다'라고 소개했다. 그냥 그게 떠올랐다. 뭔가 불완전한 문장을 내뱉은 것 같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 어느 날, 무의식적으로 한 단어가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건 바로 '호수'였다. 잔잔하고 평온한 호수가 떠올랐다. 평소 성격은 평화주의자에 감정기복이 없는 편이다.
'호수'라는 표현을 쓴 이유를 더 찾아보자면 실제로 호수감상하는 것을 좋아한다. 출렁이는 바다보다 잔잔한 호수가 좋다. 여행을 하면서 호수에 시선을 빼앗기고, 여유를 선물 받은 기억이 꽤 있다.
생각난 김에 사진 앨범에서 아름다웠던 호수를 본 기억을 꺼내봤다. 내게는 3곳의 '인생 호수'가 있다. 첫 번째는 중국 운남성 여행(쿤밍-따리-리장)의 중간 여행지 따리에서 만난 얼하이 호수이다. 눈부신 맑은 날씨에 한없이 반짝였던 호수가 참 아름다웠었다. 찬란했다. 날씨, 자연, 여행하는 자의 자유 3박자가 잘 맞았다.
중국 따리 얼하이 호수
두 번째는 중국 항저우의 유명 관광지 서호이다. 항저우에 머무르는 내내 서호를 방문했다. 아침 일찍 호수 주변을 산책했고, 오후에는 가만히 앉아서 호수를 바라봤고, 일몰을 감상했다. 안정감과 여유를 누렸던 좋은 기억이 있다.
중국 항저우 서호
마지막은 가장 최근에 다녀온 대만 뤄동운동공원의 무지개 호수이다. 대만 드라마 상견니의 촬영지여서 그 이유만으로 갔었는데 뜻밖의 인생 호수를 만나고 왔다. 그날도 날씨가 좋아 호수는 빛나고 있었다. 신석기시대에 와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자연의 순수함을 그대로 느꼈다. 호수를 그윽하게 바라보며 바람도 느끼고, 새소리에도 귀 기울이고, 지나가는 오리들에게 시선을 줬다. 한적하고 평화로운 오후를 호수와 보냈다.
대만 뤄동운동공원 무지개 호수
바다도, 산도 좋지만 호수가 참 좋다. 나를 표현해 줄 단어가 '호수'라는 게 창의적이지는 않지만 나답다. '아름답다'라는 말의 어원은 '나답다'라고 한다. 아름답다는 곧 '나 아닌 것을 나답게 여기는 것이다.'호수를 보고 아름다움을 느낀 걸 보면 나다움을 느껴서 그런 게 아닐까?
한 줄의 자기소개 문장이 감성 에세이로 이어져서 당황스럽지만 어쨌든 한 문장을 완성해서 좋다. '나는 잔잔한 호수 같은 사람이다.'는 문장이 정답은 아니다. 더 나은 표현이 떠오를 가능성이 많다. 그전까지는 호수로 나를 표현해야겠다.
한 번쯤은 '나는 ㅇㅇㅇ한 사람이다.'에 대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꽤나 가치 있는 빈칸이 아닌가 싶다.당신은 어떠한 사람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