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화면에 띄워진 엑셀 시트를 아내 옆으로 돌려 보여주었다. 며칠 밤을 고민하며 정리한 우리 가족의 수입과 지출 계획표였다. 아내는 천천히 숫자들을 훑어내려가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충분히 허리띠 크게 안 졸라매고 살 수 있겠네. 지금이랑 별 차이 없잖아.”
그 한마디에 가슴을 누르고 있던 묵직한 돌덩이 하나가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외벌이 가장에게 경제적 대안이 없는 휴직 선언은 무책임한 통보에 불과하다. 나는 아내를, 그리고 나 스스로를 설득하기 위해 휴직 기간 지켜야 할 세 가지 대원칙을 세웠다. 첫째, 자산 증식은 못 하더라도 모아둔 돈을 깎아먹지 말 것. 둘째, 커리어에 도움 안 되는 일을 억지로 하지 말 것. 셋째, 현재의 생활 수준을 유지할 것.
불행인지 다행인지 마흔 초반임에도 아직 전세살이를 하고 있고, 전세 대출은 다 갚아서 우리에겐 빚이 없다. 전세 연장도 몇 달 전에 해서 전세금이 더 들어갈 일도 없다. 매달 나가는 대출 이자가 없다는 점은 이번 결심의 가장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먼저 최근 몇 달간의 지출을 파악해 세 카테고리로 분류했다.
첫째, 매달 예외 없이 발생하는 고정 지출(약 115만 원)이다. 우리 세 가족의 전체 보험료 합계는 고작 7만 원이다. 최근 몇 년간 나는 보험사 건물과 직원들의 연봉이 결국 가입자의 주머니에서 나온다는 사실에 주목했고, 대부분의 보험을 과감히 해지했다. 대신 부부 실비 보험료라 생각하고 매월 15만 원씩 별도의 병원비 적립금을 모으고 있다. 우리나라의 의료보험 체계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급여 항목만으로도 충분히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고, 필요한 비급여 항목은 직접 모은 자금으로 충당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라는 계산이 섰다.
부모님 용돈과 경조사비, 자동차 유지비를 위해 매달 45만 원을 따로 적립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올해부터는 부모님께 드리는 용돈 액수를 조금 더 올렸다. 생활 수준을 유지한다는 차원에서 휴직 기간에도 무보님 용돈을 줄이고 싶지 않다. 그로 인한 불필요한 걱정도 끼쳐드리고 싶지 않다.
19년 전 가입한 내 청약 통장과 10년 된 아내의 청약 통장은 소액이라 큰 부담이 되지 않아 유지하기로 했다. 통신사에 재직 중인 덕분에 휴직 기간에도 내 스마트폰 요금은 지원을 받는다. 사소하지만 든든한 복지라는 것을 새삼스레 휴직을 앞두고 느낀다.
둘째, 생존을 위한 필수 지출(약 60만 원)이다. 식재료비 50만 원과 생필품 10만 원을 책정했다. 내가 휴직을 하면 세끼를 집에서 해결해야 하니 식재료비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요리하는 것을 즐기는 내 성격상, 직접 건강한 식재료를 골라 식단을 짜는 일은 고역이 아니라 즐거움이다. 이번 휴직의 목적 중 하나가 건강 회복인 만큼, 코스트코와 동네 마트를 적절히 활용해 몸에 좋은 '집밥'의 비중을 높일 계획이다.
셋째, 삶의 질을 결정하는 선택 지출(약 165만 원)이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그만큼 행복과 직결되는 영역이다. 외식과 배달비로 25만 원을 잡았다. 아무리 요리가 좋아도 삼시 세끼를 매번 차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신 일주일에 한두 번은 가족과 함께 외식이나 배달 음식을 즐기며 여유를 찾기로 했다. 여가비 50만 원은 그간 일에 치여 흔쾌히 들어주지 못했던 가족 여행과 주말 나들이를 위한 비용이다.
딸 이나의 교육비는 월 30만 원으로 책정했다. 이 지점에서 우리 가족은 천운을 만났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국공립 유치원에 당첨된 것이다. 당첨 확인 버튼을 누르던 순간의 짜릿함은 대학 합격 통보보다 더 강렬했다. 만약 사립 유치원에 보내야 해서 월 70만 원씩 나갔다면, 나의 육아휴직은 애당초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아이가 쑥쑥 크는 바람에 매 계절 새로 사야 하는 옷과 신발 비용 10만 원도 꼼꼼히 챙겨 넣었다.
마지막으로 부부의 용돈은 각 25만 원씩이다. 사실 내 취미는 돈이 거의 들지 않는다. 집 근처에 있는 구립 도서관이나 밀리의 서재에서 책을 빌려 보고, 집 근처 양재천을 달리는 것이 전부다. 러닝화 욕심도 많이 내려놓았고, 작년에 사둔 신발이 아직 박스에 남아 있어 올해는 추가 지출이 없을 예정이다. 가끔 친구들을 만난다 하더라도 용돈은 남을 것 같다.
아내에게는 25만 원이라는 돈이 부족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절약하는 삶에 묵묵히 동참해 주는 아내에게 미안하고 고마울 따름이다.
전체 지출을 합산하니 매월 약 340만 원이라는 숫자가 도출되었다. 숫자를 정리하고 나니 비로소 휴직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자신감으로 바뀌었다. 우리 부부가 절약하며 성실하게 삶을 꾸려오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엑셀 창에 정렬된 데이터들은 이제 나의 휴직이 '현실 가능한 미래'임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이제 이 340만 원을 어떻게 채울 것인지 수입 계획을 확정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