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자, 잘 살아.
원고를 ‘마지막으로 저장’한 밤.
문장들은 조용히 화면 속 네모난 바다에 눕고 나는 노트북을 덮었다.
뚜껑이 ‘탁’ 하고 닫히자마자 오래 잠겨 있던 서랍 하나가 마음속에서 함께 열렸다.
그에게서 왔던 편지.
두께보다 무게가 먼저 느껴져 차마 펼치지 못했던,
마른 잉크가 스스로 바스러질까 두려워,
한 번도 숨을 안겨 주지 못했던 봉투.
나는 봉투 모서리를 따라 숨을 고르듯 천천히 뜯었다.
첫 줄에 적힌 “안녕, 나의 바다”라는 인사가
희미한 종이 먼지와 함께 방 안 공기를 파랗게 데리고 들어왔다.
"언제나 반가운 이름, 어떻게 불러도, 불뤼워도
늘 환하게 웃어주는 너의 모습, 네 얼굴, 모든 게 다 그리울 거야.
첫 장부터 그리움으로 시작하는 이 글은 아마도 온통 그리움일 것 같아.
너는 나에게 언제나 그리움이야. 그리고 기다림이지.
떠나는 당일에도 나는 내가 너와 함께였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아.
해주고 싶은 게 참 많았는데, 제대로 못해준 것만 같아서
사실 마음이 많이 불편해.
너는 마냥 좋다고 하겠지만, 충분치 않은 기분이 드는 건...
아쉬움이겠지?
그래, 너는 나에게 늘 아쉬움이기도 해.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는, 더 이상 다가갈 수 없는 아쉬움...
시간이 참 빨리 사라졌다.
사라졌기보단 우리가 삼켜버린 것 같아.
늘 지나고 후회가 되네.
우리가 남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어떤 이야기들을 만들어 갈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이야기들로 인해 얼마나 많이 설레고 기쁠까...
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게 될까?
...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이 새벽이 온통 까만색이야.
나는 이 어둠을 사랑하지만 조금 두렵기도 해.
내가 없더라도, 외로워말고...
많이 보고플 거야."
읽는 동안 울음도 한숨도 나오지 않았다.
편지는 이미 지나간 파도였고,
나는 그 파도가 남긴 흡사 투명한 조개껍데기를 손바닥으로 뒤적였다.
빛의 방향에 따라 무지갯빛으로 번쩍이기도,
회색으로 깨지기도 하는 조가비.
편지를 접어 머그잔 옆에 세워 두었다.
마른 잉크가 방금 숨을 토해 낸 듯, 봉투 끝이 아주 조금 들썩였다.
나도, 여전히 너가 보고싶지만...
이젠 괜찮아.
주전자에서 가늘게 끓는 물을 내리자 원두가 부풀어 오르며 어두운 거품을 토했다.
그 김 사이로 새하얀 고양이 하나가 살금살금 들어왔다.
머리 한가운데 검은 말편자 모양 얼룩이 걸려 있어,
멀리서 보면 행운의 부적을 이마에 얹고 다니는 듯했다.
니모는 포근한 등으로 내 발목을 스치더니 편지 위에 앞발을 올렸다.
“거긴 아직 따뜻해.”
토스터 ‘딸깍’—밀려 나온 식빵 가장자리가 연갈색이었다.
니모가 빵 냄새를 따라 꼬리를 세우고 의자 위에 점프했다.
“오늘은 반쪽은 너 몫이야.”
버터를 얹던 숟가락이 접시를 두드렸고, 그 울림에 맞춰 허밍이 살짝 흘렀다.
밤마다 나를 조이곤 하던 그 노래는
이제 흉터가 아니라 호흡이 되었다.
조용한 새벽이면 하품하듯 허밍이 먼저 흘러나온다.
난 달의 반대편에서 일어났어요…
가사를 끝까지 부를 필요도 없다.
멜로디 몇 음만 흘리면 남은 구절들은 파도를 건너와 알아서 채워 준다.
때로는 라일의 목소리로, 때로는 영원의 웃음으로,
또 어떤 날은 전혀 모르는 사람의 숨결처럼.
멜로디 몇 음만 떠올렸을 뿐인데 부엌 공기가 파도처럼 잔잔히 흔들렸다.
니모가 한 번, 짧게 울었다—마치 라일의 가시 끝이 톡 건드려지는 소리.
나는 컵받침을 밀어 놓으며 생각했다.
라일의 따끔함도, 영원의 웃음도, 그리고 이제 니모의 체온까지—
모두 내 아침을 데우는 작은 행운들이구나.
동텀과 동시에 스피커 알람이 켜지고, 아이들이 계단을 타닥타닥 내려왔다.
토스터의 두 번째 빵이 뛰어오르자 니모가 몸을 길게 늘이며 하품을 했다.
사라진 것들은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지만,
새로 생긴 것들은 언제나 흰 털처럼 가볍게 어깨에 내려앉는다.
아이들은 어제처럼 서로 장난치며 분주한 아침을 보냈고,
어제 쓴 원고는 편집자에게 보내졌으며,
욕실 거울 앞의 나는 오늘도 낯설게 살아 있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방울에 손등을 비추다 보면
가시가 남긴 잘린 자리들이 여전히 미세하게 빛난다.
그날 바다에서 느꼈던 ‘칼날 같은 파도’의 기억이
문득 그리울 때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안다.
가시가 피부를 찌르던 순간조차
그것이 품었던 온기가 있었다는 것을.
따끔함과 따뜻함이 한 몸이었으며,
그 이질감을 견딘 덕분에
나는 파도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저녁이면, 집 앞 골목 전신주에 불이 들어온다.
나는 습관처럼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고,
라일과 영원의 이름도 마음속으로 가만히 호명한다.
가시도, 편지도, 노래도, 파도도
모두 이 골목 끝 작은 하늘에 희미하게 걸린다.
그리고 작게 중얼거린다.
잘 자.
잘 살아
이제 그 두 마디는
누군가를 향한 축복임과 동시에
나에게 건네는 새 인사말이다.
달빛이 깎여 가도, 파도가 물러나도,
끝내 손바닥엔 잔향 같은 미열이 남는다.
그 미열이 사라질까 두려워하던 날들은 지나갔다.
미열은 이제, 내가 앞으로 걸어갈 밤길을
은은하게 비춰 줄 작은 등불이 되었다.
‘영원’은 내게 늘 웃음으로 떠오른다.
세상 끝에서도 농담을 건네며, 울음을 먼저 씻어 내주던 사람.
그 웃음 덕분에 나는 끝내 외투를 여미고 거리로 나설 수 있었다.
‘라일’은 한 번도 만져 본 적 없는 가시였다.
어깨를 찌르던 따끔함, 뺨을 스치는 따스함—
언제나 동시에 나를 찔러 깨우고, 품어 안던 환한 존재.
그 가시가 없었다면, 나는 내 속 어둠을 끝내 들여다보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들은 지금도 파도 속 어딘가에서 웃음을, 가시를,
그리고 ― 나를 살아 있게 해 준 작은 떨림을 흔들고 있을 것이다.
나는 미소로 답한다.
달빛은 다시, 잔향처럼 손금 사이를 흐른다.
이제 내 이름 앞에도, 너희 이름 앞에도, 그리고 기억 속에 그에게도...
잘 자.
잘 살아.
나는 오늘 밤도 작은 등불을 품은 채 걸어간다.
파도가 불러 주는 이름들 사이로, 내 발자국은 천천히 길을 익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