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에 남은 미열처럼
차가웠다.
눈을 뜨자 바다는 허리께까지 밀려와 있었다.
한밤의 물빛은 칼날보다 매끄러웠고, 동시에 새벽빛처럼 연했다.
“영원… 라일…”
이름을 부르면 파도결에 묻혀 잔물결로 흩어졌다.
파도가 물러섰다.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얇은 칼끝을 밀어왔다.
물비늘이 살을 스쳤지만 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바다는 내게서 무엇을 덜어내고 싶은 걸까.
바람이 귓가를 스쳤다.
물결에 반사된 웃음—라일일까,
아니면 방금까지 내 곁에서 재잘대던 영원일까.
소리는 바람 아래로 미끄러졌고, 향만 남았다.
소금과 해조, 그리고 아주 옅은 들국화향.
하늘은 자줏빛에서 푸른 잉크로 번졌다가,
달빛 한 줄기를 따라 잔잔히 쉬어 갔다.
색들이 서로를 껴안듯 스며들자 바다는 그 채색을 고스란히 품었다.
왜… 다들 어디로 가버린 거야.
속삭임은 모래알처럼 가볍게 흩어졌다.
자갈이 굴러가는 투명한 소리, 기포가 터지는 미세한 음,
먼바다에서 부는 피리 같은 바람이 겹쳐 귀를 채웠다.
숨이 짧아졌다. 비린내 대신 맑은 한기가 폐 속을 씻었다.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발목을 감싼 모래가 부드럽게 나를 붙들었다.
‘살아 있다.’
방금 전 영원이 입김처럼 내뱉던 그 말이
이번엔 짠 피 냄새로 되돌아와 목을 적셨다.
나는 손을 뻗었다.
빠져나가는 허공 사이로,
살갗에 미세한 포옹이 감겼다.
소금보다 짙은, 녹슨 금속 냄새. 라일이었다.
모래사장에서 숨을 돌렸다.
물빛이 벗겨진 자리엔 달의 은가루가 촉촉이 내려앉아 있었다.
토해낸 건 짙은 바닷 물 뿐이었는데, 대신 폐 끝까지 맺혀 있던
황홀과 공포가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눈을 들자 두 그림자가 겹쳐 있었다.
라일인가, 달빛을 머금은 영원인가.
둘 모두인 듯, 둘 모두 아닌 듯—
고요했고, 아름다웠다.
영원이 먼저 웃었다. 그 뒤로 라일이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오래 묻혀 있던 기억이 포화점에 닿아
달처럼 둥글게 부풀어 오른 순간의 표정.
우리 추억이 보름달만큼 차올랐다.
이제 저 달이 눈썹만큼 가늘어지면,
다시 잊힐까.
나는 모래 위에 손을 뻗었다.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손바닥에 남는 미열 하나만큼은 잡아 두고 싶어서.
어디선가, 허밍이 물결을 타고 번졌다.
달의 반대편에서 시작되는, 그 오래된 노래.
처음엔 멀리서 속삭이는 듯하더니,
금세 물속 확성기처럼 볼륨이 솟구쳤다.
고막이 아니라 가슴뼈가 먼저 떨렸다.
난 달의 반대편에서 일어났어요—
아직 어둡고, 고요해요…
그 옛날 그와 내가 함께 꿰매 두었다고 믿었던 멜로디였다.
음악은 귀보다 폐가 먼저 알아챘다.
짧게 죄였다가, 잔잔히 풀렸다.
소금기 어린 공기 위를 얇게 떠도는 선율.
붙들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방금 손바닥에 남은 미열처럼
그 노래를 잠시 쥐고 있었다.
노랫말이 반쯤 흘러나왔을 때,
검은 파도 속에서 실루엣 하나가 형체를 세웠다.
라일인지, 아니면 잿빛 기억 속 ‘그’인지 알 수 없었다.
몸통은 물비늘로 이루어졌고, 목 아래엔 녹슨 냄새가 맴돌았다.
“돌아가.”
입 밖으로 내보낸 한 음절이 허밍에 삼켜졌다.
그림자가 손을 내밀었다.
차가운 파도가 가슴께까지 끌어당겼다.
나는 걸음을 떼지 못한 채, 그 검은 윤곽을 바라봤다.
“여기서, 멈춰.”
입이 아니라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림자가 손을 내밀었다. 냉기가 목까지 차올랐다.
‘잘 자’라는 인사는 닿질 못하고…
그 순간 오래 감춰 둔 문장이 떠올랐다.
나는 아직도 잘 자라는 말을 기다리고 있구나.
애써 없앤 줄 알았던 바람이, 여전히 몸속에 돌고 있었다.
그래, 당신들은 떠났지.
나는 허밍에 묻어 두었던 분노를 처음으로 입 밖에 꺼냈다.
가사는 속삭임이 아니라 지시처럼 박혔다.
미안해, 나 아직—
끝말이 채 떠오르기 전,
바다 위를 지나는 전신주가 탁! 하고 스파크 튀듯,
멜로디가 번개 맞은 전선처럼 끊겨 버렸다.
“싫어!”
팔을 휘젓자 손바닥 사이로 거센 물이 튀고,
노래결은 낡은 레코드 바늘이 홈을 벗어날 때 나는
크르르르— 하는 긁힘으로 산산이 부서졌다.
빛바랜 필름이 상영기 안에서 타 들어가듯,
눈앞 그림자가 파도 속으로 들리며 사그라졌다.
나는 왜 늘 잘 자라는 말을 기다렸을까.
이젠, 내가 나에게 해도 되잖아.
그 생각과 함께, 내 안에서 또 다른 내가 조용히 말을 걸었다.
어쩌면 나는 이 순간을 아주 오래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가시를 품은 채 바다로 들어서는 라일처럼,
바닥을 차고 다시 삶 위로 솟구치려 했던 영원처럼,
나 역시 긴 방황 끝에서 지금 이 바다 앞에 서 있다.
이제야 알겠다.
내가 바라보던 건 언제나 바다가 아니라,
그 위에 흐릿하게 비친 나 자신의 모습이었다는 걸.
무언가를 끊임없이 기다리던 나.
인정하기 싫은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해 발만 구르던 나.
결국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건
누군가의 부재가 아니라
나 스스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래, 어쩌면 이 바다를 건너야 하는 건 나 자신인지도 모른다.
내가 버려야 할 건 기억도 상처도 아니라
언제나 두려움 속에 숨어 있던 나 자신일지도.
이제 더는 도망치지 않으리라 결심한다.
누가 떠나고 남았느냐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나로 살아갈지가 중요하다는 걸 알기에.
나는 그 모든 날카로운 기억과 따뜻한 순간들을 품고서,
여기 바다 앞에 선 나를
처음으로, 있는 그대로 끌어안기로 했다.
그 순간, 긴 숨을 몰아쉬듯 바람이 불어왔다.
물결의 잔향이 발등을 타고 흘러내렸고,
서늘한 공기가 두 볼을 부드럽게 쓸고 지나갔다.
파도가 아주 천천히 손을 내밀어 내 턱 끝을 어루만졌다.
마치 처음 만지는 무언가를 기억하려는 듯이.
그리고 바다는,
오래 품어왔던 비밀을 내려놓듯
조용히 한 걸음 물러섰다.
손바닥을 펼치니 아무것도 없었다.
미열 대신 달빛이 얇게 고였다.
그 빛은 금세 손금 사이로 흘러내렸지만
이번엔 놓치는 감각이 아니었다.
잘 자.
나는 파도에게 조용히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잘 살아.
스스로에게도 처음 끝까지 해 보는 인사였다.
달은 점점 가늘어지고 있었지만
미끄러진 달빛이 발목에 부드럽게 와닿았다.
차갑지 않았다.
노래 대신, 숨이 고르게 이어졌다.
파도는 잠깐 망설이다가—
칼날 아니, 부드러운 손바닥으로 돌아왔다.
숨을 길게 내쉰 뒤, 나는 모래를 짚고 일어섰다.
다리를 떨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라일…? 영원아…!”
목소리를 세 번쯤 불러도 돌아오는 건 파도 잔음뿐.
달빛이 모래 위에 드문드문 찍힌 발자국을 비추었지만
물결 하나에 금세 지워졌다.
해변 끝까지 시야를 훑었다.
잔잔한 윤슬 위엔 어떤 그림자도 떠 있지 않았다.
파도소리 사이사이 귀를 기울였지만,
허밍도, 익숙한 웃음도 잡히지 않았다.
나는 발끝으로 물가를 손처럼 더듬었다.
차디찬 물속에서 라일의 가시 한 조각이라도 찾고 싶었다.
그러나 손에 잡히는 건 부드러운 모래와 식어 가는 물방울뿐이었다.
가슴이 순간 헛헛했으나,
곧 어딘가 깊은 곳에서 방금 전의 미열이 다시 맥박처럼 뛰었다.
그들은 이미 여기에 스며든 거야.
달빛 아래서 그렇게 스스로를 안도시키자,
바다가 다시 한 걸음 물러서며 숨통을 열어 주었다.
나는 손바닥을 펼쳤다.
달빛 한 줄기가 얇게 고였다가 손금 사이로 미끄러졌다.
달은 가늘어지고 있었지만
퍼진 빛이 발목에 포근히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