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바다

평범함이 자꾸 이별처럼 느껴지던 날

by 선인장 소녀 라일

길가에 놓인 길고양이를 위한 밥그릇과

젖지 말라고 씌워놓았던 노란 우산.

처음 가본 그 동네는

그렇게 작고 사소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작은 골목, 낮은 돌담길,

그 너머로 반짝이는 바다의 윤슬—

우리의 바다는, 아름다웠다.

저 파도는 왜, 어찌하여 저토록 찬란한 윤슬로
나를 불러내는가.


"근데…"
영원이 갑자기 킁킁댔다.

"한국 바다는 더 짜다? 냄새가?"

킥킥 웃으며 덧붙였다.
"미국 바다는 땅덩이가 너무 넓어서 그런지…
뭔가 이렇게, 물을 탄 바다 냄새야. 희석된 느낌?"

나는 피식 웃었지만,
생각해 보니 그 말도 좀 일리가 있었다.

맞아.
여기 바다는 좀 막무가내 같아.
코끝을 쏘고, 옷에 냄새 배고, 마음까지 젖게 만들어.

영원이는 바다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며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근데 그래서 좋은 것 같아.
막 덤벼들고, 울컥하게 만드는 이 냄새—
나 살아있구나, 싶어지게 해."

우리의 그림자가,
마치 바다 위에 선 키다리 아저씨처럼
저 멀리까지 길게 드리워졌다.

그 그림자를 밟으며 웃고 떠들다가
우리는 근처의 조그만 카페로 들어갔다.
영원이 괜히 어른스러운 척하며 말했다.


"뱅쇼 두 잔 주세요."

그게 뭐야?
"몰라. 그냥… 오늘은 처음 해보는 걸 해보고 싶어서."

따끈한 뱅쇼 잔을 받아 든 영원이
코를 잔 깊숙이 박으며 말했다.
"… 이거 약간 빨간약 냄새나는데?"

나는 웃으며 잔을 들었다.

뱅쇼 처음 마셔봐.

"오늘은 그냥… 다 처음이어야 할 것 같아서."

나는 웃으며 잔을 들었다.
그래도 오늘은 왠지,
모든 걸 ‘처음’으로 채우고 싶었다.

… 아니,
사실은 마지막으로 채우고 싶었다.
말하지 못한 인사처럼,
다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처럼.


내 말에 영원이가 날 슬쩍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더 붙이려다 말고, 그냥 잔을 들었다.

아무도 묻지 않았고, 나도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는 각자의 이유로, 이 바다에 온 거니까.


그 공간에서 잠시의 행복을 빌린 후

우린 카페에서 나와

조금 달아오른 볼을 식히며 밤바다를 향해 걸었다.

해가 지는 바다는

마치 마크 로스코의 캔버스처럼
짙고, 무겁고, 그러나 가만히 스며드는 색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보랏빛에서 남색,
남색에서 먹먹한 회청색으로
층층이 겹쳐진 하늘과 바다.

그 사이,
작은 사람 둘과
조용히 흐려지는 그림자 하나.

말도 없이,
우리는 그 그라데이션 속에 녹아들었다.
마치 어느 색 위에 또 다른 색이 덧칠되듯이.

선명하지 않아도 진한 선 하나로.


모든 게 평범해 보이는데,

그 평범함이 자꾸 이별처럼 느껴지던 날이었다.


파도가 밀려왔다.

아무 말 없이,

그러나 너무 많은 말을 품은 채.


조금 전까지 내 안에서 신나게 바라보고 있던 라일이
갑자기 조용히 속삭였다.

“들어가고 싶어.
이 바다 안으로.”


나는 멈칫했다.
겨울이야.
“알아.”
차가울 거야.
“알아.”

나는 말리려다 말고,
그저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


라일이 파도 가까이 다가가려는 찰나—

나는 무심코 뱉었다.


선인장이 바다에 들어가면,
죽는 거 알지?


라일이 걸음을 멈췄다.
뒤돌아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이
낯설 정도로 맑았다.

“응, 알아. 그래도 만져보고 싶어.
내가 늘 멀리서만 바라보던 거.
저 윤슬, 저 짠물,
그 안에 있는 무언가를.”

나는 그 말이 이해되면서도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안 돼.

내가 말했다.
가지 마.
그렇게까지… 사라지면서까지…

“사라지려는 게 아니야.”
라일이 조용히 말했다.
“살아 있으려고 그러는 거야.”

그 말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가슴이 조여왔다.
잡고 싶은데,
놓아줘야만 하는 그 마음.

하지만 꿈이란 게, 무모할수록 더 반짝이듯이,

처음 걷는 아이의 걸음처럼

그렇게 순수하게 날 보며 말했다.


날 수 없다고 꿈도 안 꾸면
하늘도 올려다보지 않게 돼.

바람이 불었다.
찬 공기 속,
라일이 다시 바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발밑으로
검은 파도가 밀려왔다.

나는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사라지려는 게 아니라,
살아 있는 꿈을, 마지막으로 한 번 만져보려는 거였다.


그 순간—
파도 위로 어른거리는 가로등빛 속에서
라일의 뒷모습이
희미하게 영원이와 겹쳐졌다.

나는 두 눈을 깜빡였다.
잠시였지만 확실했다.

조금 전에 웃으며 바다 공기를 들이키던
영원이의 실루엣.
그리고 지금,
조용히 바다 쪽으로 걸어 들어가는 라일의 뒷모습.

그 두 그림자가
한 몸처럼 길게 겹쳐져 있었다.


입안에서 맴돌았지만
끝내 묻지 못했다.

라일이었는지,
영원이었는지,
혹은 내가 애써 잊고 있던 누군가였는지.

파도 소리가 모든 이름을 삼켜버렸다.


오늘은 처음이어야 했고, 마지막이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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