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린 웃음이 숨구멍이 되기도 해
지금 가자.
영원이가 젓가락에 떡볶이를 하나 꿰어 물고는 눈을 반짝였다.
어디를?
“바다.”
계획도 없이?
“응, 무작정.”
영원이가 떡볶이 국물을 후루룩 삼키고는 빨간 소스를 묻힌 젓가락 끝을 흔들었다.
작은 쌀떡 하나가 달랑달랑 매달린 채였다.
나는 망설였다. 스케줄 표, 아이들 등교일, 미완의 원고…
숫자와 글자가 도미노처럼 고개를 들었다가 쓰러졌다.
나는 답 대신 벽에 걸린 달력을 바라봤다. 오늘 날짜에 아무 표시도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빈칸이 이렇게 무겁다니.
그때 느꼈다. 손목에 ‘따끔’ 하고 가시 끝이 스치는 기분.
그 모든 칸 사이에 라일이 가시로 살짝 찌르며 말한다.
“지금 아니면 또 언제?”
바람 한 점 없는 거실인데, 라일의 속삭임과 함께 종이들이 사르륵 흔들렸다.
어… 아무 준비도 안 했어.
나는 변명처럼 혼잣말을 흘렸다.
“준비 안 돼서 못 떠난 날이 몇 번? 세도 못 세잖아.”
라일의 목소리가 조용히, 그러나 정확히 심장을 건드렸다.
그 말이 끝나자 영원이 휴대폰을 내밀었다.
“17시 01분 KTX, 딱 두 자리. ‘매진 임박’이래.”
—정확히 98분 후였다.
“옷 갈아입고, 원고 클라우드 올리고, 택시 타면 충분해.”
영원은 물티슈로 내 입가를 닦아 주며 웃었다.
“쓰다 만 문장보다 먼저 출발하는 기차 한 대가 더 짜릿하거든.”
나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
고춧가루 매운 기운이 폐 끝을 자극했다. 뜨겁고도 선명했다.
그래.
한 음절이지만, 내 목 안에서 출발 신호처럼 울렸다.
영원이 박수를 탁 친다.
“좋아! 떡볶이 국물은 길에서 닦자. 택시 부르면 15분이면 역이야.”
달력의 빈칸이 갑자기 넓은 활주로처럼 보였다.
서둘러 신발끈을 조이고, 작은 배낭을 짊어지고
문 밖을 나서는 영원이의 얼굴에선 피로보다 기대로 번지는 열이 먼저 보인다.
— 싱글벙글, 정말이지 끝도 없는 웃음.
나는 말없이 짐을 꾸렸다.
폴더마다 흩어진 원고 파일을 하나씩 메일로 올리고,
동그라미 없는 달력을 접어 가방 맨 아래에 넣었다.
지퍼를 닫는 소리만 방안을 가른 채,
떠밀리듯이, 그러나 내 발로 문을 나섰다.
사람들은 마치 자막 없는 무성영화처럼
조용히 캐리어를 밀고 있었다.
나에겐 역도, 기차도 처음이었다.
영원은 매점 앞에서 두 팔을 번쩍 들었다.
“달걀! 사이다!”
나는 웃듯 한숨을 쉬고,
편의점으로 향했다.
사이다와 삶은 달걀은 옛날 기차의 전설이라지만
우린 사이다 대신 캔커피, 달걀 대신 삼각김밥을 골랐다.
매표창구 LED에 찍힌 BUSAN 17:01.
처음 보는 행선지에 가슴이 묘하게 뛰었다.
플랫폼 15-B, 끝에서 셋째 칸.
길 잃은 고양이는 되기 싫다며 나는 영원 뒤꿈치를 졸졸 따라갔다.
우리의 기차가 움직인다.
스틸레일 위에서 첫 박동이 울리고,
도시 끝자락의 불빛들이 검은 물결처럼 뒤로 젖혀졌다.
나는 창틀에 이마를 대고, 영원의 옆얼굴을 훔쳐보았다.
창 밖 어슴푸레한 하늘보다,
영원이 띄우는 그 해사한 표정이 훨씬 더 밝았다.
연신, 싱글벙글.
이 길의 끝을 알고도 웃을 수 있다면,
그건 강인함인가, 체념인가, 아니면—
우리가 아직 살아 있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일까.
기차가 속도를 높이자 풍경은 필름에서 블루 그라데이션으로 뭉개진다.
영원은 창에 이마를 기대고 들녘 하나하나에 감탄하듯 미소를 눌렀다.
그 웃음이 마치 창밖 풍경에 투명한 유리막을 씌운 듯, 모든 것을 환하게 비출 때,
그때 귓속에서 라일이 나직이 속삭였다.
“봐, 세상 참 아름답지? 구름도, 철길도, 저기 은빛 지붕도.”
나는 헛웃음을 삼키며, 일부러 흘겨보듯 창밖을 가리켰다.
아름답다니, 그건 네 착각이야.
결국 우릴 삼킬 바다로 가는 선로 아니던가.
영원은 내 말을 못 들은 듯 여전히
입맞춤처럼 얇은 햇살이 그녀 콧등을 건드리며 춤추고, 그 웃음은 파도 소리보다 먼저 마음을 간질였다.
“착각이어도 괜찮잖아.”
라일은 잔잔히 덧붙였다.
“틀린 웃음이 숨구멍이 되기도 해.”
나는 창틈 사이 바람을 움켜쥐듯 손을 펴 보았다가,
허공에 맥없이 떨어뜨렸다.
그래, 착각이면 어때.
우릴 데려갈 파도 위에도 저 햇살 빛만은 분명히 반사될 테니.
나는 가방 속 만년필을 꼭 쥐었다.
아직 쓰지 못한 문장들이,
바다와 닿는 순간 어떤 물결을 그릴지 알 수 없지만—
철로가 남쪽으로 길게 휘어지자
창문 아래로 은빛 강물이 스치고,
바람 사이로, 가슴 한편이 출렁였다.
우리의 밤이 끝에 이르면,
파도는 각자의 두려움과 미련을 나란히 갈라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