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 속 영원

덩어리 진 심장이 젤리처럼 으깨지고

by 선인장 소녀 라일


2018년 겨울.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나, 지금 사라지고 있어.”

영원이었다.
울음이 섞인 목소리였다. 뒤에서 아이들 숨소리가, 작고 얕게 들렸다.

몇 시간 전, 놀이공원에 다녀왔다고 했다.

차에 잠든 두 아이를 두고, 장난감을 환불하러 잠깐 들어갔다고 했다.
“5분… 5분 만이면 될 줄 알았어.”
그렇게 말하며 울었다.

그녀는 5분 만에 체포됐다.
“내가 멍청하지 뭐… 어렸을 땐 늘 차에서 잤거든. 한국이랑 다른 줄 몰랐어.”
들어가는 그녀를 밖에서 본 경찰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나올 때쯤 다가와 수갑을 채웠다.
아이들은 차 안에서 여전히 고이 잠들어 있었고,
그녀는 유리창 너머 그 아이들을 바라보며 연행됐다.

“웃긴 건 뭔지 알아? 서류만 사인하면 보내준다길래… 난 그냥 가만히 기다렸어.

변호사, 그런 거… 생각도 못 했지.”
낮 두 시에 잡혀가, 저녁 일곱 시가 되어서야 아이들 목소리가 건물 밖에서 들렸다.
이제 집에 가나 보다 생각하는 순간, 그녀는 법정으로 향했다.

창고만큼 좁고 숨 막히는 대기실. 주황색 수의를 입은 남자들.
손목, 발목의 수갑.
그리고 팔에 커다란 남근 문신을 한 남자가 위아래로 훑으며 물었다.
“What are you doing here?”

그 순간, 자기 자신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법정에서 판사는 말했다.
아이들 ‘접근 금지 명령’에 사인하면 집에 갈 수 있다고.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저기요, 변호사 좀…”
그 순간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존경하는 재판관님, 저는 변호사 데이빗입니다. 이분의 변호를 맡아도 되겠습니까?”

그날 밤, 그녀는 아이들과 집으로 돌아왔다.
20시간 사회봉사 명령.

돌아오는 길, 변호사에게 물었다.
“이 은혜, 어떻게 갚으면 되나요.”
그는 웃었다.
“정말 괜찮습니다. 대신, 꼭 행복하게 지내주세요.”


영원이는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웃었다.

“그치...? 근데, 내가 믿어왔던 그 나라한테
뒤통수를 세게 맞은 기분이었어.
인종차별, 배신. 모든 걸 다 버리고 지금이라도 떠나고 싶어.

그런데...

근데… 날 도와준 그 변호사분 때문에,
그 하나의 믿음을 아직 못 놓겠어.”


영원이는 웃고 있었다.
잘 웃는다, 정말.

하지만 나는 안다.
그녀는 지금도 죄책감이란 감옥에 갇혀 있다.

불신, 배신, 죄책감이
그녀의 어깨 위에 얼마나 얹혀 있는지.

그녀는 그걸 신경 안 쓰는 척,
다 웃어넘기는 척,


무너지지 않으려고,
먼저 웃는 사람.


하지만 세상 밖으로 돌아온 후가 더 힘들었다고 했다.
하룻밤 사이에 엄마로서 살아온 지난날이 잊힌 듯,
손가락질은 가족, 이웃, 친구, 모르는 사람들까지…

오래전부터 준비된 듯 번져왔다.
영원은 설 자리가 없었다.

그녀는 밤이면 악몽을 꾸었다.
심장이 썰리는 꿈. 칼끝이 살을 타고 들어오고,

젤리처럼 으깨져 접시에 떨어지는 순간—
악몽은 늘 그 지점에서 끝났다.

새벽 네 시, 식은땀이 팔을 적시고 입안은 쇠맛이 돌았다.
본능처럼 손목을 더듬으면,

수갑이 남긴 눌림 자국과 흐린 흉터가 실금처럼 이어져 있었다.
달이 바뀌어도 옅어지지 않는 자국. 손끝이 그 흉터를 따라 내려가면,

심장 한 귀퉁이를 만지는 듯했다.


영원은, 우울증으로 세상을 떠난 친언니 대신 나를 오래전부터 언니라 불렀다.

절박할 때마다 맨 먼저 떠올린 번호가 나였다.
그래서 새벽 네 시 전화는 진동을 켜둘 이유도, 꺼둘 이유도 없었다.

그 시간, 더 깊이 베이지 않으려 수화기를 들고 날 찾았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호흡을 따라 쉬었다.
숨이 들릴 때마다 속으로 되뇌었다.
‘괜찮아, 아직 여기 있어.’

결국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수화기 반대편에서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친구 같고 언니 같았던 그 오랜 호칭의 무게만큼 같은 리듬으로 조용히 숨 쉬어 주는 것뿐이었다.


결국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수화기 반대편에서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친구 같으면서도 언니 같았던

그 오랜 호칭의 무게만큼

같은 리듬으로 조용히 숨 쉬어 주는 것뿐이었다.


그 후로 몇 해가 흘렀다.

흉터는 옅어지지 않았지만, 그녀의 웃음은 조금씩 또렷해졌다.
마치 오래 닫아둔 창을 단숨에 열어젖히듯, 숨이 트이는 순간들이 있었다.

지금 내 앞의 영원도 그런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 웃음이 과거를 모두 덮을 만큼 단단해졌을까.
아니면 여전히 금 간 그릇 위에 바른 옻칠일까.

그녀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눈이 반짝였다.

“지금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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