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은 몰라도, 몸이 말해주잖아.
탕, 탕, 탕—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이 번쩍 떴다.
아, 몇 시지? 오늘 뭐 있었던가.
커튼 틈 사이로 스며드는 빛이 눈부셨다.
핸드폰 화면은 꺼져 있고,
식탁 위엔 식은 커피와 구겨진 노트, 굴러다니는 빈 맥주캔들.
삼일째, 방을 벗어나지 않은 채
나만의 작은 동굴 속에서 글만 쓰고 있었다.
“야, 나 왔다!”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문을 열자, 영원이가 후다닥 뛰어들어왔다.
“야, 진짜! 너 여기서 뼈라도 묻을 기세였냐?”
미국에서 오래 살다 돌아온 영원이는
최근 15년 만에 이혼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묻지 않았다. 뭐라 물어봐야 할지 몰랐다.
그런데 그녀는, 마치 그 어색함을 풀어주려는 사람처럼,
시끄럽게, 웃으며, 방 안을 점령했다.
“야, 말도 마. 죽는 줄 알았다니까.”
영원이가 웃으며 숨을 골랐다.
마치 어디 먼 길을 달려온 사람처럼.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 괜찮아?”
“괜찮지야… 하.
내 얘기 들어볼래? 완전 영화야.”
그녀는 의자에 털썩 앉아,
손끝으로 머리칼을 몇 번 만지작거렸다.
잠깐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
남편이 바람을 피웠단다.
웃기는 건, 낯선 여자에게서 협박 메일이 와서야 알게 됐다는 것.
그 사실을 따졌더니, 그는 오히려
“네가 날 안 챙겨줘서 그랬다”며 사과를 요구했단다.
그 순간, 영원이는 현실을 알아챘다.
그래서 아이 셋을 위해 사실을 감춘 채
그냥 조용히, 50:50으로 나누고 이혼했다고 했다.
“와이프, 엄마, 이혼녀, 싱글맘…
꼬리표 하나쯤 더 붙는다고 대수겠어?”
영원이는 얇게 웃었다.
“근데 말이야, 내 이름 ‘영원’이 사라지는 건…
그건 좀 싫더라. 그래서 다 내려놓고, 그냥 ‘영원’을 택했어.
그게 나니까.”
그 말을 듣고 나도 웃었다.
저 단순함, 저 미지의 행성에서 떨어진 듯한 에너지.
그래서 나는 오래전부터 그녀를 ‘외계인’이라 부른다.
영원이는 냉동실에서 떡볶이를 꺼냈다.
“이걸로 아침, 콜?”
식탁 위에 흩어져 있던 빈 맥주캔을 치우며
마치 숨을 고르듯, 덤덤하게 덧붙였다.
“이혼 잘한 거 같아.
불면증도 없어졌고, 수면제도 안 먹어.
호르몬 치료제? 이제 하나도 필요 없다더라.
내 마음이야 어떨지 몰라도, 몸이 먼저 말해주잖아.
잘한 거 맞지?”
그리고는 크게 웃었다.
나는 맥주캔을 굴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가시나, 여전하네.”
나는 아직도 내 이별 속에 웅크리고 있는데.
쟤는 다 부서지고도 저렇게 웃는다.
부럽다. 진심으로.
“난 그냥 셀프 디스 하기로 했어.
붙을 꼬리표면 내가 먼저 붙여버리지, 뭐.
그리고 누가 그러더라—
이혼한 예술인이 더 섹시하다고.”
나는 피식 웃었다.
그 단순함이, 조금은 부러웠다.
영원이의 손길이 스친 자리마다
방 안의 어질러진 것들이 제자리를 찾았다.
문득, 창가를 본다.
아무도 없다.
발을 흔들던 라일도,
웅얼거리던 목소리도,
방 안 어딘가를 채우던 기척도.
그냥, 없다.
그 부재가 공기를 비워내는 순간,
방 안이 조금 더 커진 것 같았다.
텅 빈 자리에 영원이의 웃음소리만 맴돌았다.
그 웃음이 가벼워 보이는데,
왜인지 더 무겁게 느껴졌다.
땡!
전자렌지의 소리에 정신이 돌아온다.
나도 덩달아 물 두 잔을 준비한다.
손끝이 약간 떨린다. 왜지?
“그래서, 얼마나 있을 거야?”
입술이 마르고, 나는 내 목소리가 낯설다.
“글쎄, 흠… 모르겠어.”
영원이는 떡볶이를 꺼내며 어깨를 으쓱인다.
“사실, 아직 내가 뭘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부딪혀보려고.
원래 바닥 한 번 치고 올라와야 더 높이 올라간다며. 알지?
수영장에서 꼬록꼬록 빠지다가도 저 밑에 바닥 한 번 닿으면, 그걸 차고 올라올 수 있잖아.”
나는 피식 웃는다.
치… 수영 못하면서.
“이론상으로는 완벽하다고!”
영원이가 크게 웃는다.
“몸이 따를지는 모르지만, 내 느낌으로는… 한 오 년 뒤에?
다시 올라올 수 있을 거야.”
조용히 묻는다.
“힘든 건… 마음 쪽은, 좀 괜찮아?”
영원이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잠시 나를 본다.
“야, 그럴 겨를이 어디 있어.”
웃음 반, 한숨 반.
“감정? 금방 잊혀. 그거마다 붙들면… 못 살아.
그냥 쿨하게, 극 T 모드 간다― 알지?”
나도 피식 웃었다.
예전엔 눈물 많던 애였는데…
힘을 주고 웃는 걸 보니 많이 아팠구나 싶다.
물잔을 건네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소매 끝 사이로 드러난 하얀 손목.
불규칙한 자국들이 바랜 글씨처럼 박혀 있었다.
피부에 눌러 새긴 문장처럼, 오래된 흉터였다.
영원이는 내가 본 걸 모른 척하며 웃었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죽을 수도 있었잖아.
아니, 그랬으니까.
그녀는 흉터를 내려 가리고
다시 떡볶이를 한 점 집어 넣었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물잔을 그녀 앞으로 밀어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