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의 이유

ㅡ<행복의 정복>을 읽고

by 지얼


전날 밤의 즐거움이 크면 클수록 아침의 권태는 더 깊어지게 마련이다.

ㅡ버트런드 러셀 <행복의 정복> 중에서


버트런드 러셀


"자극이 지나치게 많은 삶은 밑 빠진 독이나 다름없다"라고 버트런드 러셀은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전날 밤의 과도한 즐거움은 아침의 권태로 갚아진다는 것을 젊은 시절의 과도한 음주로 깨달았다.


알콜성 우울증


나는 이것을 심하게 앓았다. 과도한 음주 이후에 눈을 뜬 아침은 언젠가 본, 지금은 제목조차 생각나지 않는 어느 영화의 한 장면을 닮았다. 그 장면은 축제가 끝난 다음 날 아침의 해변가 풍경이다. 인적 없는 해변가에는 전날 밤에 사람들이 남긴 쓰레기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고, 문을 닫은 가게와 텅 빈 놀이기구는 적막만이 가득하다. 구태여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황폐' 정도가 될까.

그런 아침에 누군가가 내 머리에 리볼버의 총구를 대고 방아쇠를 당긴다고 해도 그다지 그가 원망스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인간은 쾌락(행복)과 권태 사이에 매달려 있는 시계추'라는 말을, 젊은 시절의 나는 이렇게 이해했다. 인간이 쾌락(행복)을 추구하여 결국 그 쾌락의 대상을 손에 넣게 되더라도 시간이 지나게 되면 결국 그것은 초기의 호기심과 관심이 사라지고 무색무취의 권태로만 남게 된다는 것. 그리하여 다시 쾌락의 다른 대상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다는 것.

문득 친구 K 군의 말이 생각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혹자는 설령 장원영과 결혼을 하더라도 전원주랑 바람을 피우고 싶어 한다"라고(물론 나라면 절대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일견 말도 안 되는 이 얘기의 함의는 아마 장원영조차도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에서 자유로울수는 없다는 얘기일 듯싶다.


쌩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어린 왕자는 자신의 소혹성 B612호에서 자신이 마음을 다해 아끼고 돌보아 준 장미가 지구에서는 속된 말로 '굴러다니는', 다시 말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해빠진 장미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어쩐지 닳고 닳아 속악해진 어른이라면 그에게 이렇게 조언할 것 같다. "어린 왕자야, 그만 울고 내 말 좀 들어보렴. 네 장미가 지금은 설령 이 세상의 유일무이한 '온리원'이라 할지라도, 결혼을 해서 오랫동안 같이 살면 어차피 '애니원'이 되고 만단다."

여성이라면 이런 밥맛 떨어질 견해에 대해 도종환 시인은 이렇게 썼다.


아내와 나는 가구처럼 자기 자리에

놓여있다 장롱이 그렇듯이

오래 묵은 습관들을 담은 채

각자 어두워질 때까지 앉아 일을 하곤 한다

어쩌다 네가 아내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내의 몸에서는 삐이걱 하는 소리가 난다

나는 아내의 몸속에서 무언가를 찾다가

무엇을 찾으러 왔는지 잊어버리고

돌아 나온다 그러면 아내는 다시

아래위가 꼭 맞는 서랍이 되어 닫힌다

아내가 내 몸의 여닫이문을

먼저 열어보는 일은 없다

나는 늘 머쓱해진 채 아내를 건너다보다

돌아앉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본래 가구들끼리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그저 아내는 방에 놓여 있고

내는 내 자리에서 내 그림자와 함께

육중하게 어두워지고 있을 뿐이다

ㅡ도종환 <가구> 전문


익숙한 존재는 우리에게 물이나 공기, 혹은 가구와 같다. 기실 꼭 필요하지만 마치 없어도 되는 것처럼 거의 의식하지는 않는. 15세기의 라파예트 부인은 <클레브 공작부인>에서 이렇게 썼다.

"하지만 남자들이 영원한 약속 안에서 그 열정을 계속 간직할 수 있을까요? 그런 기적이 제게 일어날까요? 제 모든 행복이 될 그 열정이 사그라지는 걸 분명 지켜봐야 할 거예요.(...) 우리가 이루어지고 나면 저는 더 이상 당신 행복의 이유가 되지 않을 거예요. 저는 제게 그랬듯 다른 여자를 대하는 당신 모습을 보게 되겠지요."


K 군의 극단적인 얘기를 납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성복 시인은 <프루스트와 지드에서의 사랑이라는 환상>이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썼다.

"그런데 사랑이 대상의 부재를 통해 존재하고 성장한다는 것은 곧 사랑의 원동력이 되는 상상력이 '결핍'이라는 조건 위에서 작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적으로 상상력은 '소유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다."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빨강머리 앤>은 이런 심리를 어슴푸레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예쁜 옷이 참 좋아요. 하지만 기억하는 한 지금까지는 한 번도 예쁜 옷을 입어본 적이 없어요. 오히려 그 편이 즐거울지도 모르죠. 호화스러운 옷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으니까요."




다시 쇼펜하우어의 '쾌락과 권태' 얘기로 돌아가자. 쾌락 지속의 결과는 권태이고, 권태를 극복하는 방법은 쾌락의 획득이다. 과연 인간은 시계추, 혹은 쳇바퀴를 도는 다람쥐의 팔자와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흔히들 하는 얘기가 있다. 지긋지긋한 직장 생활을 때려치우면 원이 없겠지만, 막상 백수로 2,3개월을 살아봤더니 도저히 못 견디겠더라는. 가장 원했던 것도 지속이 되는 한 결국 무감동, 혹은 권태의 상태로 회귀하고야 만다.


경차를 타고 다니는 내가 누군가에게 말한다. "선생님께서는 좋겠어요, 그랜저 같은 좋은 차를 타고 다니시니." 그러자 그가 화를 내며 말한다. "누구 놀리는 거임? 사업에 망해서 애지중지했던 람보르기니를 팔고 지금은 그랜저 따위나 타고 다니는 중인데." 뭐, 다 그런 거다. 절대적인 것보다는 상대적인 것에 민감해진달까. 우리에게는 상대성 감지의 회로가 대뇌 어딘가에 장착되어 있다. 감옥에서의 삶을 자유로 인식하는 유일한 방법은 오랫동안 독방에 갇혀 지내는 것일 테다.

엔도 슈사쿠의 소설 <깊은 강>의 등장인물인 '기구치'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미얀마의 정글에서 아사를 면하기 위해 인육을 먹을 수밖에 없었던 끔찍한 경험으로 인해 반찬 투정을 하는 손자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있음'은 '없음'으로 유의미해지는 것이고, 빨강머리 앤이 깨달은 것도 아마 이런 사실일 테다.


사랑에 빠진 자의 의혹과 불안은 '도망가는 존재들', 달리 말해 항시 달아날 가능성이 있는 대상들에게 이른바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다. 그러나 그들이 달아날 가능성이 없어지고 그들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사라질 때, 그들은 우리가 달아준 '날개'를 잃고 그들 자신으로 되돌아간다. 즉 그들은 다시금 '거의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이다.

ㅡ이성복 <푸르스트와 지드에서의 사랑이라는 환상> 중에서


그런즉 '없음'을 모르면 '있음'에 대해 만족할 수 없다. 결핍에의 인식이 충족에의 행복을 생성한다. 아무리 풍요로운 것일지라도 이미 주어진 것인 한, 그것은 돌이 높은 곳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 된다. 당연한 것에는 기쁨이나 감동이 없다.


쓰고 보니 진부하다. 어쩔 수 없다.

그게 사실이니까.




알콜성 우울증을 심하게 앓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혹은 망상)이 들었다.

한 명의 인간이 하루동안 누릴 수 있는 행복의 양은 기실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닐까? 만일 특정한 어느 날이 과할 정도로 즐거웠다면, 그다음 날은 넘치는 양만큼의 반대급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평상심이라는 것을 0으로 놓았을 때, 오늘 10 정도의 즐거움을 누렸다면 다음 날에는 마이너스 10의 반대급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오늘의 쾌락은 내일의 불쾌로 상쇄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만남은 이별을 전제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오늘의 만남이라는 기쁨은 언젠가 이별의 슬픔으로 상쇄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문득 불교에서 말하는 '8고'가 떠오른다. 생로병사의 4고(苦)에 애별리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부득고(求不得苦), 오음성고(五陰盛苦)를 더한 8고.

애별리고는 사랑하고 애착하는 대상에서 분리되는 고통이고 구부득고는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이라고 했다. 이 두 가지 고통은 상호 모순적이다. 애초에 바라지 않았다면 분리의 고통도 따르지 않았을 테니. 구부득고에서 벗어나면 결국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애별리고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라면 아마도 이렇게 말했을 것 같다.


구부득고의 해소 이후에는 점진적인 권태만이 남는다

애별리고는 차라리 축복이다


서머싯 몸이 <레드>에서 그렇게 쓰지 않았던가? 사랑의 진정한 비극은 헤어짐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도종환 시인의 관점으로 말하자면 <접시꽃 당신>이 <가구>로 전락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비극이라고.


결국 이 모든 말은 내일의 평상심을 위해 오늘의 기쁨을 추구하지 말라는 얘기로 귀결되는 것 같다. 글쎄다. 뭐, 그럴 수만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쇼펜하우어라면 저녁의 집밥을 맛있게 먹기 위해 점심의 뷔페를 마다하라고 강권할지도 모르겠다.

버트런드 러셀은 아마도 우리에게 이렇게 권유하는 듯싶다. 뷔페라면 마다하고, 양장피 정도면 즐겨 먹어라.

결국 중용에 관한 얘기다. "전날 밤의 즐거움이 크면 클수록 아침의 권태는 더 깊어지게 마련이다."


나는 극단적으로 자극(쾌락)에 반대하는 사람은 아니다. 일정한 양의 자극은 건강에도 이롭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듯이 문제는 그 양에 있다. 자극이 너무 적으면 병적인 갈망을 자아내고, 너무 많으면 심신을 황폐하게 한다.

ㅡ버트런드 러셀 <행복의 정복> 중에서


그렇다면 <접시꽃 당신>과 <가구> 사이의 중용은 대체 무엇일까? 잠깐 알랭 드 보통의 말을 들어본다.


한때 그가 낭만이라고 보았던 것-무언의 직관, 순간적인 갈망, 영원의 짝에 대한 믿음-이 두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유지하는지를 배워가는 데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랑을 유발했던 신비한 열정으로부터 눈을 돌릴 때 사랑이 지속될 수 있음을, 유효한 관계를 위해서는 그 관계에 처음 빠져들게 한 감정들을 포기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이제 그는 사랑은 열정이라기보다 기술이라는 사실을 배워야만 할 것이다.

-알랭 드 보통 <낭만적 사랑과 그 일상> 중에서


낭만적 사랑, 혹은 열애를 지나 서로에게 '가구'가 아닌 반려 존재로서의 일상을 살아가는 기술을 배워야 한다. 낭만적 사랑이란 일종의 환상이다. 아마도 이성복 시인이 말하고자했던 것도 이런 의미였으리라.

그러므로 농도 과잉의 호르몬 작용으로서의 열애는 이제는 그만 칭송되어야 한다. 다소 밋밋하게 느껴지더라도 그래야만 한다. 우리가 진정 어른이라면.

지난밤에 가열된, 아니 과열된 축제의 해변가는 다음 날의 황량한 모래사장으로 남는다.


...현대의 시끄러운 소동의 대부분은 시적이며 무정부적 충동인 로맨틱한 사랑을 단순한 사회 제도에 지나지 않는 결혼과 혼동하는 데서 유래하고 있다.

-버트런드 러셀 <인생론> 중에서


러셀처럼 단순한 사회 제도로 치부하는 것에 거부감이 들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로맨틱한 사랑에 대한 세간의 미몽을 일깨우려는 의도로 읽는 편이 나을 것 같다.




독서가 재미있을까? 글쎄다. 사람들이 독서를 멀리 하는 이유는 이 세상에 독서보다 재미있다고 여겨지는 것이 많기 때문일 테다. 즉각적이고도 보다 자극적인 즐거움을 주는 데 있어서 책이라는 매체보다는 영상이 더 효과가 좋으니까(책만이 영상에 비해 오락적으로 열등한 것은 아니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도 기타 연습에 열중하기보다는 틈만 나면 유튜브의 '짤'을 본다).

일상을 잘 영위하는 것과 독서는 질적인 공통분모가 있다. 과열된, 혹은 진한 맛의 쾌락에서 떨어져 있으면 (좋은 의미로) 미온적이고 은은한 맛의 즐거움을 일상이나 독서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은 다음 날의 황량함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허진호 감독의 <행복>이라는 영화를 매우 좋아한다. 극 중 '영수(황정민 분)'는 비유하자면 과열된 축제, 혹은 대도시와도 같은 과잉 쾌락의 삶을 추구하지만 '은희(임수정 분)'는 시골로 대변되는 이른바 '슬로 라이프'를 지향한다. 다음의 대사가 참으로 인상적이다.


"은희야. 너 밥 천천히 먹는 거, 지겹지도 않니? 난 지겨운데."


우리가 행복하지 않다면, 아마도 밥을 천천히 먹는 법을 잊어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영화 <행복>의 한 장면



https://www.youtube.com/watch?v=hqePZy3LvPQ

편곡/연주 :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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