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주상보시

ㅡ보답을 바라지 않는 선행

by 지얼

https://youtu.be/wSwHQcllI-U?si=-aCqCC_CJqz5NG0N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건 역시 장난으로 남을 속이는 거다.

몰카의 형식은 아니지만, 나도 소싯적에는 남들 속여먹기를 즐겨하곤 했다.

물론 위의 영상처럼 악기로 속인 것은 아니다.

어차피 기타로 속일 만한 대가의 실력이 아니었으므로.


할 일이 더럽게 없던 K대(군대) 공병학과 병장 말호봉 시절의 어느 날,

점심시간이 되어 밥 먹으러 식당에 갔다. 이등병 계급장을 단, 새로 전입해 온 신병들이 구석 자리의 테이블 한쪽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중 한 명을 바깥으로 불러내었다.


"너, 오늘 왔냐?"

"이병 홍기동(가명)! 예, 그렇습니다!"

"야야... 괜찮으니까 좀 조용히 말해. 알았지?"

"아닙니다!"

"아니긴 뭘 아냐. 좀 조용히 말하라니까."

"네.... 알겠습니다."

"너한테 부탁이 있는데..."

"네, 말씀하십시오."

"한 10분만 나랑 잠깐 군복 바꿔 입자."

"네? 왜..."

"까라면 까. 이유는 묻지 말고. 그리고 넌 잠깐 여기에서 대기하고 있어."


그렇게 이등병 계급장이 붙어있는 신병의 야상과 모자를 착용하고 그들이 있던 자리에 슬쩍 끼어들어 앉았다. 물론 얼굴이 안 보이도록 모자는 푹 눌러쓴 채로.

당시 우리 부대는 일병들이 대신 배식을 받아 신병들에게 직접 가져다주는 친절한 전통(?)이 있었다. 드디어 밥과 국이 가득 담긴 식판이 내 앞에 놓였다. 들릴까 말까 한 목소리로 나지막이 한마디 했다.


아... 반찬 존나 구리네...


식판을 가져다준 김 일병이 멈칫한 채 말했다.

"뭐? 뭐라고? 너 지금 뭐라고 했냐?"

음성을 변조한 채 큰소리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냐.... 너 뭐라고 했잖아."

"별 말 안 했습니다."

잠시 의혹의 눈길을 보낸 김 일병이(사실 의혹의 눈길을 보냈는지 알 수 없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으니까) 돌아설 때 다시 한마디를 던졌다.


시발, 개밥이야 뭐야


"너, 이 새끼가!" (추정컨대) 눈을 부릅뜨며 김 일병이 갈구기 시작했다. "이 새끼가 미쳤나? 뒤질래? 야, 밥 처먹기 싫으냐?"

"네. 존나 먹기 싫습니다." 그리고 한마디를 더 던졌다. "이런 개밥은 너나 드십시오."

고개를 들었을 때 그 벙찐 표정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아니, 지금 뭐 하십니까?"

"ㅋㅋㅋ... 너도 함 해봐. 졸라 재밌어."




미국의 교회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새로 부임할 목사는 교회에 처음 간 날, 부러 부랑자 차림으로 성도석 자리에 앉아 있었다. 더럽고 냄새가 났기 때문에 아무도 가까이 가지 않았고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머잖아 다른 곳으로 떠날 목사가 새로 부임한 목사를 소개하는 시간이 왔다. 소개가 끝난 후 부랑자가 천천히 단상으로 올라갔고 짧은 설교를 했단다. 내용이야 뭐 대충 이러지 않았을까. 예수 가라사대,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예전에 이런 상상을 한 적이 있다. 추운 겨울날, 거리를 걷고 있는데 지하철 계단 중간 즈음에 어떤 노인이 추위에 벌벌 떨며 구걸을 하고 있다. 그냥 지나가려다가 '옷이 너무 부실하신데...' 하는 생각이 들어 큰맘 먹고 오리털 파카를 벗어 노인 분에게 건넨다.


"할아버지, 이거 입으세요."

"아니.... 그럼 자네는 어떡하려고..."

"전 괜찮아요. 집이 바로 이 근처거든요."

내친김에 오만 원 지폐 한 장을 손에 쥐어드리면서,

"추우신데 이걸로 따뜻한 국밥이라도 드시고 오세요."


여기까지는 상상이기는 해도 나름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에 관한 미담이다.

여기까지만 했어야 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아뿔싸. 학생증이 없다.

노인 분께 건넨 오리털 파카 주머니 속에 있었던 거다.

급히 노인이 계셨던 곳으로 찾아가 보았지만, 이미 종적을 감추신 후다.


며칠 후,

멋진 슈트 차림의 한 중년 남자가 학교로 찾아온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대기업 XX에 다니는 백성기 상무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저희 회장님께서 지난번에 지하철역에서...."


그리하여 나는 59년 산 깁슨 기타(약 10억 원)를 살 수 있게 될뿐더러 장원영을 닮은 회장 딸과 사귀다가 결혼까지 하게 되어 결국 회사의 후계자가.......

sticker sticker

ㅡ이후의 이야기는 <사족>에서 확인할 것.

ㅡ물론 읽을 가치는 없음.




"아니야, 제롬. 아니야. 미래의 보상을 위해서 우리가 덕을 쌓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은 아니야. 우리의 사랑이 찾고 있는 것은 보상이 아니야. 자기 고통에 대한 보수라는 생각은 고귀하게 태어난 영혼에게는 모욕적인 말이야. 덕이란 그런 영혼을 위한 장신구가 아니야. 그것은 그런 영혼이 지니는 형식인 거야."

ㅡ앙드레 지드 <좁은 문> 중에서



사족 :


.... 그렇게 회사의 후계자가 되어 재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리고 <타임>지가 선정한 '올해의 영향력 있는 인물 50'에도 포함되는 황금시대를 보낸다. 그러나....

장원영 급의 외모에도 질려버린 나는 카리나를 닮은 비서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것이 발각되어 급기야 이혼당하게 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수백억 원대의 분식회계로 인해 실각은 물론, 징역을 살게 된다.

출소 후, 갈 데가 없어진 나는 하루하루를 음주와 도박으로 낭비하다가 결국 역삼역 지하철 계단에서 구걸하는 처지로 전락한다.

그러던 어느 추운 겨울날,

한 청년이 내게 다가오더니 자신의 외투를 벗어 내게 주는 것이 아닌가.

"할아버지, 이거 입으세요."

"아니.... 그럼 자네는 어떡하려고..."

"전 괜찮아요. 집이 바로 이 근처거든요."

그러더니 오만 원 지폐 한 장을 내 손에 쥐어주는 것이었다.

"추우신데 이걸로 따뜻한 국밥이라도 드시고 오세요."

... 그리하여 국밥에 눈물을 말아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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