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내가 박동훈 부장처럼 못 되는 이유
세상은 불붙은 성냥개비를 들고 돌아다니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ㅡ레이 브래드버리 <화씨 451> 중에서
잘 알다시피 디즈니는 실사판 <인어공주>로 다구리를 맞았다. 그리고 다구리를 놓은 타칭 '인종차별주의자'들도 소위 PC주의자들에게 다구리를 맞았다.
"아니, ㅆㅂ, 구태여 에리얼을 흑인으로 해야 할 당위성이라도 있었음?"
"흑인이 에리얼 역할을 맡으면 안 되나? 인종차별주의자임?"
뭐, 이런 식이다.
친구 K 군에게 들은 얘기인데, 예전에 TV뉴스를 통해 모 대학 남학생들의 카톡ㅡ여학생들의 외모에 점수를 매기는 일종의 '품평'에 관한 내용ㅡ이 공개가 되어 파장이 일었다고 한다. 그로 인해 대중들이 엄청난 비난을 퍼부었던 모양이다.
글타. PC적 관점으로 봤을 때, 사람이 사람을 '품평'하면 쓰나. 미인대회 심사의원들이 미인들을 점수로 심사하든, 결혼정보회사가 <결혼점수확인>을 하든 뭐 어쨌든,
그라믄 안 돼
다만 이런 생각은 든다. 아무리 쓰레기 같은 생각이라고는 해도 사적인 망상까지 지나치게 개입하여 TV 뉴스를 통해 까발리는 건 좀 거시기하지 않나? 보다 공적인 미인대회나 결혼정보회사는 까지도 않으면서. 사람을 보고 점수를 매기거나 소고기처럼 등급을 매겨 품평하는 짓거리도 다 저런 것에서 배우지 않았을까?
그러고 보니 문득 나의 등급이 궁금해지기는 한다.
결혼 정보 회사의 등급 기준에 따르면 나의 등급은... 아니, 나에 대한 평가는 아마도 이렇지 않을까?
이 인간은 모든 분야에서 기준치 미달이므로 당신에게 평강공주 콤플렉스가 없는 한 손절 요망.
그래서 자존감이 바닥이냐고?
글쎄다.
나는 결혼 정보 회사 따위가 요구하는 것보다는 보다 내면적인 것에 집중하고 싶다.
내면적으로 나는 훌륭한 인간인가?
솔직히 이런 일도양단식의 질문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한 명의 인간 내면의 양상은 보다 복잡하므로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예컨대 다음 중 누가 '착한' 인간인가?
A. 앙상하게 뼈만 남은 유기견의 엉덩이를 발로 걷어차는 심청이
B. 불쌍한 유기견에게 매일 사료와 물을 주는 뺑덕어멈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성의 거울로 비춰 본다. 이 정도면 뭐.... 하는 생각을 하는 도중에 아이유가 나타나더니 일갈한다.
"꿈 깨시죠."
고 이선균과 아이유가 출연한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보면 어떤 생각에 섬뜩해진다. 극 중 이지안(아이유 분)은 박동훈(이선균 분)의 휴대폰에 몰래 도청앱을 설치한 후에 틈만 나면 그의 사적 대화를 도청한다. 상상력을 좀 발휘해서 내가 박동훈 부장이라 치고, 스무 살가량 어린 이지안이 내 핸드폰을 며칠간 도청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이지안은 나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아마도
뭐 이런 쓰레기 같은 아재가 다 있어....
.... 가 아닐까?
혼자 있을 때의 나는 아무 데서나 방귀도 뿡뿡 뀌고 가끔 코딱지도 팔 뿐더러 비속어 남발에 보다 젊었을 때에는 야심한 밤에 야ㄷ...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쌈마이스럽기는 해도 이게 나다.
그렇다고 교회에서 예배 중에 엉덩이를 긁적거린다거나, 소개팅 자리에서 코딱지를 후비적후비적 판다거나, 장원영 같은 처자 앞에서 방구를 뿡뿡 뀌는 정도는 아니다(뭐, 장원영 앞에서라면 분출 직전의 그것을 초인적인 노력으로 억제하여 도로 창자에 흡수시켜 버린 다음, 체내 분출할 것이 틀림없다). 내 절친들이 나를 갈구기라도 하면 그때는 없는 방귀까지 억지로 만들어내서 그들의 면전에 뀌어대겠지만.
상대와 장소가 바뀌면 태도도 바뀐다(그러니까 기독교인들더러 위선적이네 뭐네하며 갈구지 마라. 당신들도 교회에 오면 일시적이나마 세탁이 된다).
하지만 우리는 생활의 대부분을 성당이나 교회에서 보내지는 않는다. 장원영(같은 예쁜이)을 만나는 일은 거의 없고, 아니 전무하고 불알친구들과 술집에서 만나는 게 대부분인데, 이런 자리에서 지구 온난화가 해수면에 미치는 영향이라든지, 포스트모던 이후 가치의 탈-중심화 사조 속에서 종교란 어떤 역할을 해아 하는가 하는 따위의 얘기를 할 리가 만무하다. 그 대신,
걸그룹 <(여자)아이들>의 <wife>의 가사는 과연 음란한가
오구라 유나는 은퇴했는가
미연(가명) 양의 행위는 밀당인가 나에 대한 거부인가
친구 윤발이(가명)의 소중이가 화가 났을 때, 과연 그의 말마따나 소주병 크기에 육박할 것인가
왜 친구 상준(가명)이는 상습적으로 밀폐된 차 안에서 가스 분출 후 미친놈처럼 혼자 미소 짓기를 즐기는가?
하는 따위의 쓰레기가 대부분일진대, 젊은 처자 이지안이 도청앱을 통해 도청한다고 상상해 보라. 나는 그녀에게 그냥,
폐급인간, 혹은 인간실격
취급을 받게 됨은 자명하다. 君子(군자) 愼其獨也(신기독야)가 안 되는 아재의 말로다.
그나마 자가검열을 하는 SNS상에서의 글도 PC의 관점으로 보면 질타받을 내용이 가득한데 사생활은 오죽하랴. 페이스북에서의 내 글을 PC의 관점에서 셀프디스해 본다.
1. 악기를 여성에 비유하는 가부장적 반페미니즘
2. 지름을 권장하는, 자본주의의 사생아가 배설한 물신주의
3. 음란마귀를 정당화하는 반-종교적 퇴폐주의
아.... 내가 유명인이 아니라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문득 종교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 본다.
글타.
종교는 우리 마음속 어딘가에 도청장치(혹은 도청앱)를 심어놓는데
수신자는 이지안이 아니라 바로,
작가 줄리언 반스는 저서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에서 자신이 무신론자가 될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이유들 중 가장 결정적인 것으로 다음의 예를 든다.
.... 나는 신이 존재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혼잣말을 되뇌었다. 왜냐하면 신이 내가 자위하는 걸 지켜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 더 나아가 내 조상들까지 줄지어 서서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 터무니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더 이성적인 논거들이 있었지만, '그분'의 존재를 부정할 때 가장 먹힐 만한 논거는 바로 이 강렬하리만큼 설득력을 지닌 감정이었다. 당연하지만 자기본위적인 논거이기도 했다. 막 시작하려는데 할아버지 할머니가 지켜본다는 생각이 떠오른다면 심각할 정도로 손이 굳어버릴 테니까.
문득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의 <Eye in the sky> 가사 중 일부가 생각난다.
I am the eye in the sky looking at you
I can read your mind
난 너를 지켜보는 하늘의 눈이야
네 마음을 읽을 수 있지
파놉티콘으로서의 신은
악마로서의 나로서는 정중히 사절하고 싶다...
https://youtu.be/56hqrlQxMMI?si=COVAkEW4SDN27Gqk
(사족 )
그리고 점수를 매기며 나를 품평하는 인간도 사절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