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죽허면

-심리적 괄호 치기

by 지얼




1. 나는 관대하다?


정지아 작가의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빨치산 출신, 다시 말해 전라도 출신 '빨갱이' 아버지를 둔 주인공 여성이 아버지를 인간적으로 이해해 가는 과정을 다룬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인상적인 말을 하나만 꼽으라면 주저하지 않고 '오죽허면'을 선택하겠다. 좀 자세히 말하자면 이렇다.


사람이 오죽허면 그러겄냐


도심에서 운전을 하는 중에 난폭 운전을 하는 한 운전자를 발견한다. 내 차 앞으로 다소 과격하게 끼어들기를 하는 거다. 아마도 차선을 바꿔야만 하는 필연적 이유 때문일 텐데, 당시 여자에게 까인 나는 조건반사적으로 이렇게 반응한다.

저 씨박색히가!

심리학에서 말하는, 소위 '일반적 귀인 오류'.


스님들이 그랬다. 화가 날 때 약 50초만 참으면 그 분노는 자연히 휘발된다고.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의구심이 생긴다. 50초 동안 참을 줄 아는 인간이라면 애초에 씨박색히 같은 더러운 말이 튀어나올 일은 없을 거고, 그렇다면 이미 참을 줄 아는 것이 아닌가?

문제는 분노란 대개 조건반사적이라는 거다(물론 이렇게 밖에 인성을 형성하지 못한 자신의 과오도 막중하다). 간헐적 폭발성 장애(분노조절장애)가 있는 이에게 50초를 참으라는 얘기는 조루증 남성에게 시미켄만큼만 버티라는 얘기와 같다(물론 나는 그 정도는 아니다. 절대!).


더러운 말을 내뱉은 직후에 현타가 온다. 반성한다. 내 반성은 다소 구체적이다.

그때 내가 수지(가명)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면 과연 그렇게 열폭했을까? 그때 내가 당첨된 로또 복권을 들고 은행에 환금하러 가는 길이었다면 그렇게까지 화가 났을까?

그때 접촉 사고가 나서 내 마빡에 시뻘건 피가 줄줄 흐르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그 난폭 운전자의 정체가 <미녀는 괴로워>의 김아중 같은 처자였다면?


영화 <미녀는 괴로워> 중에서
미녀에게(만) 관대한 남자...


물론 나는 믿거나 말거나 분노조절장애자가 아니고 여미새(여자에 미친 새끼)도 아니다. 물론 절친 K군은 이 얘기에 이렇게 말하겠지만. 지랄하고 자빠졌네.

어떤 아저씨가 자신의 차로 내 차(당시에는 투싼)의 범퍼를 살짝 박았을 때의 일이다. 범퍼가 찌그러지지는 않았지만, 5cm 정도 스크래치가 생겼다. 배상을 할 테니 연락처를 달라는 그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됐습니다, 범퍼란 건 원래 충격 방지하라고 만든 겁니다, 기능에 이상이 없으면 됐어요.

차 안에서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졸라 멋있었어...


그랬던 내게 당시에는 왜 그 험한 말이 튀어나온 것일까. 답은 이미 위 문장에 있다. 다시 복기하겠다.

'당시 여자에게 까인 나는....'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든다. 마음의 화약고에 불을 붙인 놈은 과연 저 난폭 운전자였을까? 아마도 그는 성냥에 작은 불 정도는 지폈을 거다. 다만 그 불붙은 성냥을 화약고로 던진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다.


헐크 후배 민준(가명) 군이 난폭 운전자를 향해 조수석에서 열불을 낸다. 아니, 저 새낀 운전을 야매로 배웠나? 저런 새끼는 구금 한 달 때려 맞아야 해. 조용히 운전만 하고 있었던 내가 쿨하게 한마디를 던진다.

똥 마려운가 보지, 뭐.

이때는 대체 왜 그랬을까? 영화 <300>의 페르시아 황제 크세르크세스가 순간 빙의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수지랑 약속이 잡혔었나 보지, 뭐.


영화 <300>의 한 장면


'사람이 오죽허면 그랬겠냐'의 응용 편이 바로 '똥 마려운가 보지, 뭐'다. 다소 일관성은 없지만, 나도 때로는 '오죽허면'을 말할 줄 아는 남자였다. 수희(가명)에게 바람맞을 때도 내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렇게 읊조렸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긴 게지.' 그러다가 10번째 바람을 맞던 날은 헐크가 되어버렸지만.


2. 상상력의 부재


'오죽허면'의 마음가짐을 나는 '심리적 괄호 치기'로 명하기로 했다. 일종의 에포케-판단중지의 태도랄까. 이런 일이 있었다.

친구 K군과 식당에 가기 위해 인근 공원에 주차하려고 했을 때다. 천천히 차를 몰고 두리번거리며 주차할 곳을 찾는데 10m 전방에 빈 곳이 눈에 들어욌다. 아싸!

하지만 그곳으로 가까이 갔을 때 실망하고 말았다. 빈 곳이 있었지만 주차를 할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은 아니었다. 어떤 소나타 자동차가 두 곳의 주차공간을 독차지하고 있었던 거다. 주차공간을 구분 짓는 주차선이 차량 가운데 아래로 통과하고 있었다. 헐크가 빙의한 나는 이렇게 분노했다.

"저 씨박색히가!"

크세르크세스가 빙의한 친구 K군이 말했다. "왜?"

"두 대를 주차할 수 있는 공간에 저따위로 주차를 하다니! 어떤 새낀지는 몰라도 저 밖에 모르는 거 아님?"

K군이 말했다. "그게 아닐 거야. 주차공간이 좁다 보니 저 소나타 앞, 또는 뒤에 있었던 차도 다른 차량 때문에 주차공간 안에 정확하게 주차하지는 못했을 거야. 그렇게 조금씩 밀리다 보니 결과적으로 저 소나타는 주차 구분선 한가운데 주차하게 된 것일 테지. 그 후에 앞, 뒤의 차가 빠져나간 통에 저렇게 오해를 받을 만한 모양새가 되었달까."


이 얘기를 들었을 때 문득 중딩 시절에 사용했던 회수권(버스 요금 대신 지불했던, 학생용 가상 지폐) 생각이 났다. 껌 크기 정도의 회수권이 일렬로 쭉 붙어있는 10매의 회수권을 11장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들은 가끔 가위로 대략 2mm 정도 회수권 경계선의 윗부분을 잘라냈던 거다(아... 이른 나이에 벌써 사기 치는 법을 배우다니!). 이게 다 가난 때문이었다.


버스 회수권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중에서


그러니까 K군의 말인즉, 그 소나타 차주는 못돼 처먹어서 그렇게 주차를 한 게 아니라 다른 차들이 조금씩 밀리다 보니 본의 아니게 정중앙을 잘라낸 회수권처럼 되어버렸다는 얘기다(언더스탠?).

그때 현타가 왔다.

내게는 왜 K군과 같은 상상력이 없을까?


수전 손택은 자신의 저서 <타인의 고통>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겪은 실패는 상상력의 실패, 공감의 실패'라고.


11장으로 조작된 저 버스 회수권의 정체를 간파했음에도 딱히 우리를 혼내지 않았던 버스 운전사 아저씨는 당시에 무슨 생각을 했을까? 혹시 이러지 않았을까?

오죽(가난)하면 그러겠냐.


이것이 심리적 괄호 치기다. 실제로 학생들이 가난한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마음을 다음과 같이 부정적 판단으로 이끌어가는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이 어린놈의 새끼들이 발랑 까져갖고 벌써부터 사기질이야, 이런 씨XX들.



3. 게슈탈트 심리학으로 듣는 헤비메탈 음악


쌍팔 년도 헤비메탈 음악을 들을 때면(그래, 나 아재다...) 위의 그림이 떠오른다. 헤비메탈 음악은 전기기타가 중심이 되는 음악이다. 당시의 헤비메탈에는 소위 '즁즁이'라는 주법을 많이 사용하곤 했다. '즁즁이'란, 기타의 저음 현을 오른손등으로 살짝 뮤트 시켜서 다소 소리를 절제시키는 기타 주법의 일종이다. 백문이 불여일청이라고 했다. MZ들에게는 다소 구리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일단 음악을 들어보자.


시나위 <새기 되어 가리> 1987년 작.


이 노래의 기타 반주는 이렇게 들린다.


-즁즁즁즁즁즁/즁즁즁즁


이거랑 위의 삼각형 그림이랑 무슨 상관이냐고? 내겐 상관이 있다. 위 그림에서 가운데의 흰색 삼각형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가상의 선을 마음으로 그려내어서 존재하는 것처럼 여긴다. 이것처럼, 위 노래의 기타 반주 <-즁즁즁즁즁즁/즁즁즁즁>에서 기타 연주자가 코드를 치는 '짠'의 순간에는 사실 저음의 '즁즁' 소리를 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내게는 이 '즁즁' 소리가 끊김이 없이 계속해서 들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치 '짠'하는 소리에 '즁즁' 소리가 음량의 차이로 인해 가려진 것처럼.

내 귀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소리를 '만들어서' 듣는 거다.


이런 효과는 이미 100년 전에 클래식 기타리스트들에 의해 시도된 바가 있다. 프란시스코 타레가가 콘차 부인과 함께 여행했던 알함브라 궁전에서의 불륜을 추억하며 작곡했다는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에 나오는 트레몰로 주법이 그렇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박규희 연주


이 곡을 들으면 '따따따따'하는, 마치 만돌린의 그것 같은 소리의 멜로디와 아르페지오(분산화음)의 반주를 들을 수 있다. 멜로디의 '따따따따'하는 구슬 굴러가는 소리는 끊김이 없이 연속해서 들리겠지만 사실 이'따따따따'는 엄연히 분절이 존재한다.

쿵따따따/쿵따따따/쿵따따따/쿵따따따......

사실상 엄지손가락이 '쿵'을 치는 순간에는 멜로디의 '따'가 연주되지 않는다. 엄연히 음의 분절이 발생한다. 그럼에도 우리 귀에는 연속적인 '따따따따따따따따...'가 들린다. 우리의 뇌가 '쿵'의 순간에 '따' 소리를 만들어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갑자기 웬 딴소리냐고?


4. 안 보여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작년 여름의 어느 날인가, 떡볶이가 먹고 싶었던 나는 전화기를 들어 주문을 했다. 요리에서 배달까지 길게 잡아도 30분이면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한 시간이 다 되어서야 배달이 왔다. 화가 났지만 배달 아저씨에게 처맞는 것이 두려워서 표를 내지는 않았다.

씨부엉, 이거 다 식었잖아.....

대체 왜 늦은 걸까? 중간에 멈춰 서서 담배를 한 대여섯 대 쯤 피웠던 걸까? 배달원이 어리바리해서 집 주소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걸까? 그래서 정 반대에 있는 동네까지 갔던 것은 아니었을까?

멍청한 놈.


작년 12월 3일 이후로 생업이 어려워졌다는 얘기는 전에 했다. 계속해서 적자가 났다. 세컨드 잡이 절실해졌다. 그래서 알바 사이트를 열심히 뒤졌으나 취업이 잘 되지 않았다(나이 탓이지 뭐). 결국 주변의 권유로 음식 배달원으로 데뷔하게 되었다(지금은 택배기사로 변경되었다).

데뷔 첫날, 새삼 나라는 인간에게는 적응하는 데 많은 시간이 요구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배달하는 곳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지연 배달을 하고 만 거다. 공교롭게도 그때의 음식은 떡볶이였다.

이런 일도 있었다. 두 군데의 식당에서 각각의 요리를 받은 후에 두 군데의 집을 순차적으로 찾아가려 했는데 아뿔싸, 치킨을 주문한 집에 족발을 들고 찾아간 거다... 음식 교체하느라 시간은 지연되었고, 아마 치킨은 식었을 테다.


왜 직접 체험해 보기 전에는 해당 직군 사람들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택배가 늦게 도착할 때 왜 택배 기사들의 성실함을 의심하는 걸까? 택시 기사가 무뚝뚝하게 대할 때 어째서 그의 인성이 나쁘다고 단정해 버리는 걸까?

없는 삼각형은 뇌가 선을 만들어서라도 인지하려 들고, 실제로 들리지 않는 소리는 뇌가 해당 음을 만들어서라도 연속적으로 감각하려고 하는 데 반해, 타인의 처지에 대해서는 어째서 상상력의 실패로 귀결되고 마는 걸까? 왜 공감의 실패로 귀결되고 마는 걸까?


스크린샷 2025-06-26 오후 4.34.00.png


진화에서, 생존에 이로운 형질은 유전이 된다고 하나(물론 진화가 항상 진보의 성격을 띠지는 않는다고 한다) 인류애나 휴머니즘 같은 도덕적 심성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현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아들인 코모두스는 그 꼬락서니인 거다.

현명함은 유전되지 않는다. 어쩌면 공감 능력도 마찬가지일 테다.

왜 그럴까?


태곳적 선사시대로 돌아가 본다. 나는 '여미새 족'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낯선 한 무리의 인간들이 우리 부족을 찾아온다. 정체를 도통 알 수 없는 이들을 두고 어떤 판단을 내려야 생존 확률이 높을까? 당근 개자식들이라고 여겨 죽여버리는 게 생존에 이롭다. 괜스레 잘해줬다가 잠자는 동안 칼침을 맞을 수도 있으니까. 고로 낯선 타인을 경계하는 것은 일종의 유전 정보다. 작금에 비교적 안전한 문명사회에서 살고 있어도 부정편향의 그 본능은 여전할 테다.

그래서 타인에 대한 경계심을 내려놓는 것은 물론이고 그들의 잘못이나 실수에 대해서 관대해지기가 이토록 어려운 걸까? 그래서 이해에 앞서 몰이해의 적개심이 선행되는 것일까? 소나타 차주는 '씨박색히'가 될 수밖에 없는 걸까?

뭐, 아님 말고.


'(유전적으로) 원래 그렇다'는 것으로 타자에 대한 몰이해와 공감의 결여를 합리화할 수는 없다(이를 '자연주의의 오류'라고 한다지). 그렇다고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식의 무조건 덮어주기가 좋다는 얘기도 아니다. 다만 이런 생각은 든다. 우리가 도통 알 수 없는 불명료한 상황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더라도, 또는 긍정적인 상상을 할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괄호를 칠 수는 있지 않을까?

판단중지의 괄호.

수지에게 까이든 말든 상관없이(밑줄 쫙-).

안 보여도 보이는 것처럼, 안 들려도 들리는 것처럼 '오죽허면'을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나는 친구 K 군이 운전하는 차의 보조석에 앉아 있다. 인도인지 차도인지 모호한 좁은 구역에서 그가 속도를 줄인다. 바로 앞에 한 노인이 손수레를 끌며 천천히 걸어가고 있다. 덩달아 우리의 차도 저속으로 기어가듯 갈 수밖에 없다. 대체 왜 안 비켜주는 걸까. K 군이 말한다.

"노인이라 귀가 어두워서 뒤에 차가 있다는 걸 모르는 거야."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 노인은 나보다 청력이 좋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알 수 없는 타인에게 향한 괄호 안에 부정편향적 몰이해로 채워넣지 않는 일이다. 타인의 태도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는 객관성 여부에 상관없이 타인을 향한 나의 관점에 달려있다. 내 마음의 불구덩이가 타인을 화마로 여겨지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타인을 화마로 여기는 것을 습관화 할수록 내 마음속 불구덩이의 온도는 높아진다. 악순환이다.

그러니 너의 뇌를 '파블로프의 개'처럼 만들지 마라.


주차장에서 내 자리를 새치기한 운전자에게 화를 내는 것이 정신 건장에 좋을까? 정답은 'No'다. 특정 상황에 화를 내다 보면 당신의 두뇌는 비슷한 상황에서 언제나 화를 폭발시키도록 프로그래밍 된다. 마치 파블로프의 개가 종소리를 들으면 침을 흘리는 것처럼.

-슈테판 클라인, <행복의 공식> 중에서




창 너머로 큰소리로 통화하는 어떤 아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뭔가 단단히 화가 난 음성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음성은 커지고 거칠어진다.

내 귀가 괴로워지기 시작한다.

대체 무슨 일일까? 괄호 안을 상상해 본다. 친구가 돈을 떼어먹었을까? 마누라가 바람이 났나? 아니면 형이 부모의 재산을 혼자 갖고 튀었을까? 알 수 없다.

조용히 창문을 닫는다.


아직은 '오죽허면'이 나오지 않는다.


스크린샷 2025-06-26 오후 12.38.54.png


5. 사람은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야


사람으로 불릴 수 있게 되는 걸까?

그 대답은 친구여, 바람결에 흩날리고 있다네.



Bob Dylan <Blowin' in the wind>



사족 :

그렇다고 불법 계엄을 계몽이라고 생각하는 멍청이는 되지 말자.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내면의 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