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읽고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읽은 제 개인적 소감은 이렇습니다.
'메타포가 살아 숨 쉬는 삶의 활력이 어떻게 불법 쿠데타와 독재로 붕괴되는가를 보여주는 작품.'
그럼에도 역시 이 작품의 저변에 흐르는 것은 누군가의 말씀대로 '메타포의 향연'일 것입니다.
괴테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미의 세계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라고.
저는 전후 문맥을 알지 못하는 터라 이 얘기를 양가적으로 해석합니다. 긍정적인 관점으로는 아름다움이라는 표피에서 해방되어 이성을 보다 인간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로, 반대로 부정적인 관점으로는 아름다움이라는 예술적 영역, 혹은 감성적 영역에서 멀어지면서 시심을 잃어간다는 이중적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후자의 경우, 화가 들라크르와의 말을 인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름지기 위대한 예술가란) 자신의 지력이 최고조에 달하는 나이가 되까지 젊음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뜨거운 감동의 여력을 일부 남겨놓은 사람"이라는.
이 말에서 가장 눈여겨본 낱말은 '일부'입니다.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왜 들라크루아는 "뜨거운 감동의 여력을 '많이' 남겨놓은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고 "'일부' 남겨놓은 사람"이라고 말한 것일까? 어쩌면 그는 나이 듦에 따르는, 감동을 느끼는 능력의 상실을 어쩔 수 없는 과정이라고 인정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일부'라도 남길 수 있다는 것(그리고 그 일부를 에너지 삼아 무언가를 창작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위대한 예술가의 반열에 들 수 있을 정도도 그것의 남김은 지난한 일이라는 얘기가 아닐까?
계단 상단에 네모난 창을 뚫어놓아 하늘을 바라볼 수 있게끔 한, 제임스 터렐의 설치 미술 작품인 '호라이즌 룸'을 보노라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길을 걸을 때 항상 나무를 보고 산을 보고 하늘을 본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과연 '보는' 것일까? 사실은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수동적으로 '보여지는' 것이 아닐까?'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가끔은 주책스럽게 이런 생각도 합니다. '(남성분들 앞에) 장원영이 지나갈 경우, 능동적으로 주시하게 되지 않을까?'
이처럼 저 직사각형의 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수동적 '보임'에서 능동적 주시로 전환하는 태도가 아닐까요? 마치 캔버스 안의 그림을 주시하는 것처럼요.
(뭐, 아님 말고요.)
그렇게 말하고 나면 어느덧 이영애 처자... 아니, 아줌마가 다가와서는 내 귓가에 대고 속삭입니다.
너나 잘하세요
존 레넌의 노래 <Oh, my love>의 노랫말을 떠올려 봅니다.
내 생에 처음으로 느낀 사랑이여
내 눈은 활짝 열렸어요
내 생의 첫 번째 연인이여
제 눈은 볼 수 있답니다
바람을 보고 나무를 봅니다
모든 것이 마음속에서 깨끗해져요
구름을 보고 하늘을 봅니다
우리의 세상에서 모든 것이 명료해집니다
이 가사에서 궁금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왜 존 레넌은 맹인도 아니면서 새삼스럽게 '제 눈은 볼 수 있답니다'라고 말했던 것일까?
이제는 압니다. 어린 시절의 저는 반투명의 플라스틱 슬레이트 지붕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그저 듣는 게 아니라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강물 위에 비치는 햇살('윤슬'이라고 합니다)을 오랫동안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나뭇가지들이 그리는 하늘의 금(Line)을 주시할 수 있었고 빗물이 그리는 파동의 동심원을 신비롭게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My eyes can see"인 것이죠.
"감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전체 감각들이 깨어 있고 온갖 사물과 현상들이 주는 느낌을 받아들이는 창이다. 감성적이라는 것은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해 열려 있음을 말한다.
(...)감각들이 열려 있어 일어나는 모든 것을 인지할 때, 내가 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때 사랑이 전개될 수 있다."
ㅡ페터 라우스터
나이 듦에 따르는 감수성의 손실은 들라크루와의 말마따나 어쩔 수 없는 일일는지도 모릅니다. 이 감수성의 손실은 시심의 상실로 이어집니다. 한때는 김소월의 시 <금잔디>를 읽고 아릿한 정서를 느꼈지만,
잔디
잔디
금잔디
심심산천에 붙는 불은
가신 님 무덤가에 금잔디
봄이 왔네, 봄빛이 왔네
버드나무 끝에도 실가지에
봄빛이 왔네, 봄날이 왔네
심심산천에도 금잔디에
작금에는 그저 시큰둥~할 뿐입니다.
한때는 비록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해도 파울 클레의 그림을 보면서 즐거움을 느꼈지만 작금에는 '이런 거 나도 그리겠다'는 투의 기능적 관점이나 '대체 이런 그림은 가격이 얼마나 할까?' 하는 투의 자본주의적 관점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사랑에 대한 담론은 이제 무색무취한 진화심리학적인 그것으로 대체되었고 사랑의 상처는 호르몬 과다 분비에 따른 부작용 정도로 치부해 버립니다.
"장모 양반, 유물론자가 되지 마세요."
과부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유식한 척하는 양반, 유물론자가 뭐요?"
코스메가 입에 거품을 물고 말했다.
"장미와 통닭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 할 때 항상 통닭을 집는 사람이죠."
ㅡ<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중에서
누군가 제 삶의 일대기에 대해 한 줄로 요약해 달라고 하면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장미를 버리고 점진적으로 통닭을 집어드는 과정'이었다고.
이제 존 레넌의 노랫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작금에 호르몬 환원론자, 혹은 유물론자가 되어버리니 눈은 꽉 닫혀버리고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저 '보여질' 뿐입니다.
그리고 그저 보여지기만 하는 상태로는 진부한 클리셰의 메타포만 타성적으로 반복할 뿐입니다.
이제는 철학자 김용규의 말이 설핏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해석이란 무엇일까요? 만일 당신이 상인이라면 각각 등산지와 해수욕장으로 이해된 장소들을 상인이라는 '처지에 따라' '관광호텔 개발지로서' 매매합니다. 또 망치로 이해된 작업도구를 '상품으로서' 진열하지요. 하이데거는 이같이 우리가 자기에게 이해된 것들을 자신의 처지에 따라 정리하여 다시 이해하는 것을 '해석'이라고 부릅니다(...).
이 같은 해석학적 관점에서 보면, 자신 앞에 존재하는 개개의 사물들을 이해하고 해석함으로써 그것들의 '의미'를 열어 밝히는 인간이 하이데거가 말한 '현존재(Dasein)'이고, 그 현존재에 의해 이해되고 해석됨으로써 열어 밝혀진 '의미의 집합체'가 곧 '세계'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세계는 개개의 사물에 대한 이해와 해석을 통해 우리 스스로 얽어낸 '의미의 그물망'이자 우리 삶이 그려낸 한 폭의 '풍경화'인 셈이지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속성이자 은유가 가진 힘의 비밀입니다.
(...) 은유 또는 시가 우리의 현실 세계를 바꿔놓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사는 세계가 우리의 이해와 해석에 의해 구성된 의미의 집합체, 곧 '다시 만들어진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은유 또는 시에 의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해석이 바뀌면 우리의 현실 세계도 바뀔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김용규, <철학 카페에서 문학 읽기> 중에서
시심이 증발된 자리에는 모든 가치를 현실적 효용으로만 재단하는 소위 '도구적 가치'만이 남습니다. 감수성의 퇴락이랄까요.
대딩 시절의 어느 가을날 저녁, 친구인 P군과 저는 학교의 예술관 건물 입구 계단에 앉아 고전시대 기타 작곡가인 페르난도 소르의 <L'encouragement (위안) op.34 >라는 2중주 곡을 연습했습니다. 암보가 되지 않은 상태여서 무려 18페이지에 달하는 악보를 바닥에 나열한 상태에서의 연습이었습니다.
<주제와 변주> 부분으로 넘어갈 무렵, 오른쪽 방향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왔고 나열된 악보들은 공중으로 흩뿌려지게 되었습니다.
악보를 주섬주섬 주워 모으며 어이없다는 듯 함께 웃음 짓던 그 시절을 추억합니다. 음악과 바람, 그리고 별이 빛나던 밤.... 그 어느 것도 인상적이지 않을 수 없었던 그 시절의 풍경을, 그리고 습기를 머금은 감수성을 그리워합니다. 호르몬과 진화심리학으로 환원하지 않았던 그 시절의 로맨스도 가끔은 그리워집니다.
무엇보다 윤슬처럼 빛났던 메타포의 시절을, 작금의 해갈되지 않는 정서적 사막에서 그리워합니다.
수년 동안
비싼 값을 치르면서
나는 수많은 나라를 여행했다
높은 산과
대양을 보았다
그러나 내가 보지 못한 것은
내 집 문 앞 잔디에 맺혀 있는
반짝이는 이슬방울이었다
-R. Tagore